음식에 대한 호오(好惡)를 보면 그 사람의 성장환경을 짐작할 수 있다. 미각이 예민한 소년시절에 각인된 음식에 대한 기억은 평생을 간다. 산간지방 출신은 대부분 나물류에 박식하기 마련이고 해안지방 출신치고 생선 전문가 아닌 사람이 드물다. 또 대부분의 중년층은 달걀이나 만두 단팥빵 등을 유난히 좋아한다. 어렸을 때 먹고싶어도 자주 먹지 못했던 음식들인 탓이다. 반면 여름이 제철인 수제비는 보리밥과 함께 중년층 이상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다. 가끔 별식으로나 먹을까 제대로 된 한끼 식사로 인정을 못 받는다.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춘 국물에 밀가루반죽을 떼어 넣은 옛날식 수제비는 가난의 상징이었다. 쌀과 보리가 떨어질 무렵인 여름철 농촌에서 수제비만큼 만만한 끼니도 없었다. 비용이 적게 들고 만들기 손쉬워 도시 서민층도 즐겨 먹던 메뉴였다.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수제비도 맛으로 먹는 시대가 되었다. 조개로 국물을 내거나 사골국물을 써서 호박과 감자를 푸짐하게 넣고 끓여내니 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 젊은층은 수제비를 맛으로 먹지만 중.노년층에게는 수제비가 음식이 아니라 추억이다. 비라도 오는 여름날이면 수제비가 먹고 싶어도 울적해질까봐 못 먹는다는 사람도 있다. 추억의 전문점을 몇 집 소개한다. 영원(여의도 서울상가 2층.784-1866)=이 집은 원래 경양식집풍의 술집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손님이 없는 낮 시간을 활용하려고 수제비를 끓여 팔았는데 예상외로 대히트를 쳤다. 이후 낮 시간 영업이 주가 되었다. 이제는 술장사는 그만두고 전업식당으로 변신하여 메뉴도 다양해졌지만 수제비 말고 다른 메뉴를 시키는 사람은 없다. 사골국물과 감자만 넣고 끓인 뒤 소금간만 했다는 국물이 깔끔하다. 하늘하늘 부드러우면서도 쫄깃쫄깃한 수제비는 다른 집에서 흉내를 못 낸다. 일년 내내 네 가지 김치가 나온다. 푹 익은 포기김치,덜 익힌 겉절이,총각김치,물김치등 모두 수준이상의 맛이다. 삼청동수제비(삼청동 총리공관 옆.735-2965)=유명한 수제비 전문점이다. 점심 전부터 밤9시 문닫을 때까지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 맛은 사람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느낄듯 싶다. 조개로 맛을 내고 애호박이 드문드문 들어간 국물 맛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수제비 반죽이 전통적인 수제비의 맛은 아니라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숙성 안된 밀가루반죽을 기계로 납작하게 밀어 손으로 뜯은 것이기 때문이다. 항아리에 담아 줘 분위기를 내는 점이 특색이다. 뽕씨네얼큰수제비(영등포시장앞 국민은행 뒷골목.678-0142)=방송에도 소개됐던 집이지만 TV에 출연했음 을 알리는 울긋불긋한 깃발하나 없다. 공간이 작아 단골손님만으로도 만원이다. 합석도 당연시된다. 메뉴가 수제비 한가지 뿐이라 들어가 앉으면 묻지도 않고 사람수대로 만들어 나온다. 뻘건 국물에 밥까지 조금 말아서 나온 수제비가 낯설지만 묵은 김치로 끓여내 보기보다 감칠맛이 있다. 맵다고 느끼면서도 한 숟갈 두 숟갈 먹다보면 어느새 바닥을 박박 긁고 있다. 술 마신 다음날이나 입맛이 없을 때 추천할 만한 수제비이다. < 최진섭.맛칼럼니스트.MBC PD (choijs@m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