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哲煥 < 前 한국은행 총재 / 충남대 명예교수 > 지금은 철학자 이외에는 철학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은 시대이다. 존재에 대한 의문은 사치스런 지식인의 관념이고,사물과 사건의 실체적 또는 논리적 진실을 판단하기 위한 방법론이나 논리추구는 천재들의 궤변에 함몰되고 만다. 가치추구도 좋게 말해서 희망과,거북하게 표현해서 주장이나 동조요구 속으로 숨어버린다. 그러나 현실은 객관적 사실과 논리적 무류(無謬)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합리적 방법과 논리체계가 더욱 절실하다. 사실 21세기의 과학문명은 높은 수준의 합리주의적 과학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개인과 집단 모두 이해관계에 따라 정반대의 사물인식과 가치판단에 휩쓸리는 것이 다반사다. 합리적 절차에 따른 확인과 검증은 외면한 채,같은 사실과 존재유무에 대한 인식만 달리한다. 특히 합목적성을 심화하는 정계 노사 언론계의 동향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도 보통사람은 물론 지식인조차 사실(facts)과 주장(assertion)의 차이를 모를 때는 말할 것도 없고,알고서도 일부러(?) 혼동한다. 원래 '사실'은 우리가 그 사실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거나 아니거나 관계없이,그리고 여러 사람 간의 합의나 믿음,해석과도 무관하게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그 자체 상황이다. 예컨대 세종대왕이 태종의 몇째 아들인가와,빛이 태양에서 지구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인지를 모른다고 해서,세종의 태종 아들 순서와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시간이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보통의 우리가 모를 뿐이다. 또 '갑(甲)이 을(乙)을 죽였다'는 사실여부는 여러 사람이 그렇게 믿는다고 해서 사실이고,믿지 않는다고 사실이 아닌 것이 아니다. 믿음과 사실과는 별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정보와 인식한계 때문에 오랫동안 '적어도 지금 누구도 이의를 달고 있지 않는 어떤 상황〔제마르 푸레,「과학의 구성」(1992)〕'을 사실로 정의하거나,묵시적으로 동의하는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까지는 거의 모든 사람이 '태양이 매일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 다수의 믿음은 사실이 아니었다. 이의(異議)없는 다수의 의견 또는 여론을 합리적 절차에 따라 확인하고 검증하지 않은 채,사실로 믿었던 잘못을 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사실'확인은 상대주의 산물일 수가 없다. 따라서 확인과 검증 없이 다수의 믿음으로 사실임을 인식 또는 강요하는 것과,희망사항이나 미검증 주장을, 사실이나 법칙으로 착각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으로는 정쟁수준에 머물지만 지적으로는 인식의 황폐화를 초래한다. 뿐만 아니라 이론도 논리와 사실확인으로 검증되기 때문에 이론은 사실에 의해서 논박 당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교육적인 필요를 제외하고는 합리주의에 의해 확인된 사실과 검증된 법칙이 아니고는 희망사항이나 주장을 사실과 법칙으로 인식하거나 잘못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시대 지적활동의 대표적인 허구일 수밖에 없다. 다만 경직된 '사실'개념을 기초로 하는 주장과 교육이 자칫 창의성을 억압하고 비판정신을 고무시키는 데 실패할 수가 있어서 역설적 논의의 주제로 삼을 수 있다. 따라서 스스로의 고정관념뿐만 아니라 사실확인과 교육대상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인식은 잘못될 수 있다는 폭넓은 생각을 지녀야 한다. '사실'들은 우리의 주장과는 별개로 존재하고,검증은 합리적 방법론의 한계성을 지니기 때문에,지속적 연구와 창의적 교육을 위해서는 합리주의에 바탕한 확인과 검증결과조차도 또다시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실'들과 대조작업을 벌여야 한다. 그러나 합리주의 절차에 따라 확인되고 검증된 사실은 일단 존중되고 추구해야 한다. 이를 부정하거나,사실과 다른 희망사항이나 주장을 사실처럼 오도하고 주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옳은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이점을 중시하고 확인과 검증을 기초로 하는 소박한 인식방법과 사실 속에서 흔들리는 지적활동 위기를 시급히 극복해야 한다. 그것이 시들어 가는 철학적 사고와 발전의 중요한 희망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chchon2002@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