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은행들의 영업은 한마디로 맑을 때 빌려준 우산을 비올 때 빼앗아가는 격입니다. 회사형편이 좋았던 올초까지만 해도 돈좀 빌려가라고 성화였지요. 그런데 정작 회사사정이 조금 안좋아져 돈이 아쉬워지니까 바로 당좌한도를 줄이더군요." 서울 구로동에서 금속도매업을 하는 박모 사장은 자신의 경험담을 이렇게 소개했다. 때문에 그는 요즘 사채시장에서 급전을 끌어쓰고 있는데 그나마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박 사장의 이같은 전언은 최근 자금시장에 나타나고 있는 '국지적 신용경색'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 원인으로는 크게 두가지가 지목되고 있다. 첫째는 금융사 전.현직 임직원에 대한 예금보험공사의 무더기 손해배상 청구소송으로 은행원들의 몸사리기가 더욱 심화됐다는 점이다. 여기에다 일부 상장사들이 부도를 내 사채시장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 몸사리는 은행권 한국은행에 따르면 대기업에 대한 대출은 지난 4월 이후 마이너스를 기록중이다. 특히 지난 6월엔 은행들의 반기결산을 앞두고 전달(5월)의 4배가 넘는 1조2천억원을 한꺼번에 줄였다. 이는 기업들이 시설투자를 꺼려 자금수요가 줄어든 때문도 있지만 리스크(위험도)가 있는 기업 대출은 피하고 대신 가계대출에만 집중하는 은행권의 여신풍조 탓이다. 예보의 소송사태는 이처럼 소극적인 여신행태를 부추겼다. 한 여신담당 임원은 "예금보험공사의 은행 전.현직 임직원에 대한 소송사태 이후 여신담당 대리에서부터 지점장, 임원까지 요즘에는 지나칠 정도로 보수적으로 심사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또다른 은행의 여신담당 임원은 "여신심사기준상 1∼6등급 정상, 7등급 요주의, 8등급 고정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기업이 5∼6등급에 몰려 있다"며 "예전에는 5~6등급에도 쉽게 대출했지만 지금은 거의 대출을 하지 않고 있어 기업들이 자금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 얼어붙은 사채시장 은행에서 밀려난 신용도가 낮은 기업들은 기업어음(CP)이나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을 마구잡이로 발행하고 있지만 매수세력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다. 그나마 고금리 유혹에 이끌려 CP를 사들였던 저축은행들도 코오롱TNS의 부도와 대림수산 등의 채권단공동관리 신청 이후 부실이 급증하자 CP 인수를 꺼리고 있다. 이들 기업은 결국 사채시장을 찾지만 시장은 한겨울이다. 최근 상장 및 등록기업들의 잇단 부도로 거래가 뚝 끊긴 상태이기 때문이다. 명동의 사채업계 관계자는 "우량 상장사의 CP는 그나마 월 0.8%에서 거래가 되지만 코스닥 기업들에 대한 거래는 거의 끊긴 상태"라며 "특히 부도가능성이 높다는 10여개 상장.등록업체의 명단이 나돌아 시장을 더욱 냉각시키고 있다"고 들려줬다. ◆ 처방 은행과 금융사들이 리스크를 피하는데만 급급, 근시안적으로 대출을 집행하는 것은 은행 스스로 발등을 찍는 셈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부실금융회사 기업 임직원에 대한 무더기 손해배상 청구소송에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금융연구원의 김병연 연구위원은 "신용도가 낮은 기업에 대출을 해주는 시장이 없다는 게 문제"라며 "은행들이 TF(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저신용 기업에 대출을 해주는 대신 금리를 높여 받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금융연구원의 이병윤 연구위원은 "과거 은행들의 부실기업에 대한 대출은 당시 은행이 정부의 산업정책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에도 기인하므로 이러한 부실대출은 분리해 취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병연.최철규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