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독일의 뉴스전문방송인 ntv는 '연방 하원의 세대교체'란 제목으로 9월 총선 이후 연방의회를 떠날 인물들의 사진을 시리즈로 홈페이지에 올려 눈길을 끌었다. 17년간 연방총리와 26년간 의원을 지낸 '통일총리' 헬무트 콜부터,연방하원 의장을 역임한 리타 쥐스무트,법무장관과 외무장관을 지낸 클라우스 킨켈 등 정치적 거물들이 세대교체의 대상으로 올라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우리 같으면 명예훼손 소송까지는 안가더라도 상당한 소동을 겪었을 법한 일인데,그런 논란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일부 인사들은 이미 정계은퇴의 소회를 밝히는 TV 인터뷰를 하는 등 정치일선으로부터의 은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비리가 드러나 불명예 퇴진하거나,형사처벌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퇴장하는 경우라면 몰라도,제 발로 정치일선에서 물러나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거듭된 대선실패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복귀해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는,정치인의 은퇴란 것이 얼마나 가변적인 상황논리에 의해 좌우되는지를 보여주는 예다. 이른바 '386세대'로 불리는 정치신인들이 비교적 단기간에 자리를 잡은 예가 있긴 하지만,과거 정치신인들의 등장은 위로부터의 발탁과,세대 안배라는 장식적 의도가 결합된 이벤트성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간헐적이라도 신인들이 등용된 것과는 달리,연로한 지도층에서의 세대교체가 적기에 원활히 이루어진 경우는 드물었다. 지역구 국회의원의 경우 본인이 사망하거나 정략적 이유로 지역구를 떠나게 된다든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후속세대에게 지역구 넘겨주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정치인과 관료들은 죽거나 죽을 병에 걸려 기동조차 어려울 지경에 이르지 않는 한,은퇴를 모르는 대단히 희귀한 직업이다. 적기에 원활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조직은 사고가 경직되고 활력이 떨어져 외부환경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기 어렵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목표수행 자체가 실패하기 쉽다. 조직에 '신선한 피'가 공급되지 못하면 비전이 경화되고,그 혈류순환의 맥락들이 급속히 부식하기 시작한다. 70이 넘어도 연부역강,능력을 발휘하는 사례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정년이란 업무수행 능력의 상실이나 급격한 저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개인의 노력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그 전보다 더 우수한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그렇지만 통상 정년을 기준으로 퇴출시키는 것이 조직 전체의 신진대사를 위해 도움이 된다는 거시적인 지혜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정한 연령에 도달하면 물러나도록 함으로써 세대교체를 자연스럽게 제도화하려는 것이 정년제의 취지라면,정년 도달 전이라도 새로운 사고와 젊음을 갖춘 후속세대에게 스스로 공직을 넘겨주고 물러나는 것은 미시적인 개인의 도덕적 지혜라 할 수 있다. 이런 미시적 지혜가 쌓일수록 그 사회는 훨씬 더 조화롭게 발전할 것이다. '젊은 피'가 자연스럽게 공급되도록 함으로써 세대교체가 원활히 이루어지고,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행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지혜가 유독 정치인들에게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정치인들에게 정년을 요구하기는 어렵다. 가령 국회의원에게 65세나 68세 등의 정년제를 받아들이라면 펄쩍 뛸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는 '자신이 맡은 중책 때문에''하늘같은 신임과 책임감'에 겨워서,또는 '일신상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가족의 행복을 희생하면서까지' 공직을 버릴 수 없다고 '버티는' 정치인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왜 우리는 '평생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기 위해' 사의를 표하는 장관들을 볼 수 없는가. 왜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죽을 때까지 멸사봉공'하려고만 하는가. 표를 얻기 위해 공중목욕탕을 돌며 때밀이를 마다하지 않은 아내를 위해,또는 평소 하지 못했던 소설이나 그림,여행을 하기 위해,다들 그리도 목을 매는 의원직을 흔쾌히 버리고 인간의 얼굴로 돌아오는 모습,정치인의 아름다운 은퇴를 보고 싶다. joonh@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