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의회는 1948년 7월12일 공화국의 새로운 헌법을 제정,이를 7월17일에 공포함으로써 '제헌절'로 기리고 있다. 그 공화국 헌법의 제정주체는 바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국민'이었다. 헌법 제1조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 공화국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공화국에 대칭되는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이다. 그러나 제헌헌법의 그 타협적이고 갈등적인 헌법규범은 오늘날까지 한국헌법사를 얼룩지게 하는 긴 흠집을 남기고 있다. 국민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복지를 향한 공화국의 이념과 지표보다,당리당략에 얽매인 집권세력의 일탈된 행동은 헌법을 요동치게 했다. 공화국 건설의 주체인 국민은 뒷전으로 밀려나고,집권자의 자의적 노리개로 헌법은 전락했다. 그런 척박한 상황에서 그 어떠한 헌법이 탄생한들 그것은 정권의 실패와 헌법의 실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간 아홉 차례에 걸친 헌법개정사는 그 얼룩진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연장을 위해 대통령직선제를 도입한 1952년 제1차 개헌의 절차적 위헌성 △초대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을 철폐한 1954년 제2차 개헌의 의결정족수를 위배한 소위 4사5입 개헌 △1960년 3·15부정선거에 항의한 4·19학생혁명에 따른 제2공화국의 의원내각제 헌법 △반민주행위자 처벌을 위한 소급입법의 헌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1960년 제4차 개헌 △5·16군사쿠데타에 따른 헌법의 정지와 1963년 제3공화국 헌법 △대통령의 집권연장을 위한 1969년 제6차 개헌 △유신정변에 따른 1972년 제4공화국 헌법 △1980년 서울의 봄을 무참하게 짓밟은 제5공화국 헌법을 거쳐 △대통령직선제 쟁취를 위한 6월 항쟁 이후 마련된 현행 제6공화국 헌법으로 이어졌다. 그 사이에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은 자의반타의반 여섯자리 숫자에 이르는 공화국 숫자의 증가로 이어졌다. 1987년 민주화 시대를 풍미한 야당의 지도자 김영삼 김대중의 분열은 군출신 대통령시대를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1992년 3당야합이라는 비판속에서도 김영삼은 대통령에 당선됐다. 국민적 개혁의지를 국정에 투영하려는 문민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임기말 터진 아들의 비리에 이은 금융비리는 마침내 미증유의 IMF체제로 막을 내렸다. 김영삼정부의 실패는 역설적으로 1997년 김대중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정권교체 한번 해보지 못한 '한국민주주의의 한(恨)'은 국민의 정부 탄생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임기말 불거진 부패 스캔들과 친인척 비리는 또 다른 실패를 예고하고 있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의 실패는 민주화투쟁 경력이 곧 국가경영 능력으로 연결될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게 됐고,그것은 곧바로 대한국민과 한국민주주의의 부담으로 남게 됐다. 군사문화에 젖은 권위주의시대에 대통령 권력의 인격화를 통한 지배는 이제 문민지도자에 의한 영웅주의적 대통령의 시대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것은 제왕적 대통령제란 이름으로 정부의 실패를 문책하기도 하고,대통령중심제적인 헌법의 실패를 나무라기도 한다. 1997년 대통령선거기에 제기됐던 권력분점론은,이제 또 200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제왕적 대통령제의 극복이라는 명제를 던져주고 있다. 전·현직 대통령의 실패가 헌법의 실패이든 정권의 실패이든 간에,그 실패는 실패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위한 설계로 이어져야 한다. 지난 반세기 이상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국민적 열망은 새로운 공화국의 숫자매김과 더불어 새로운 웅비를 준비해 왔다. 아무리 거센 파도가 휩쓸어 가도 그 자리에 남겨진 파도의 흔적은,한국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고귀한 싹으로 작동해 왔다. 돌이켜 보면 그간 제발로 걸어서 청와대를 나가지 못하던 '대통령의 실패'에 이은 '헌법의 실패'는 정권교체와 더불어 이제 살아있는 전직 대통령들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비록 그들이 여전히 실패한 대통령으로 머물지라도 그들의 실패는 새로운 교훈을 남겨 줄 것이다. 그 옥석을 가리는 것은 국민의 몫으로 남게 된다. 그 국민적 통찰력과 예지를 통해 미래를 향한 공화국의 영속성이 보장될 수 있을 것이다. nakin@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