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泰吉 < 서울대 명예교수.학술원 회원 > 축제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고 막을 내렸다. 이제 우리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철한 심정으로 뒤를 돌아보고 앞날을 설계할 시점에 서있다.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하다. 2002 한·일 월드컵이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어떤 의의를 갖는가를 결정하는 것은,이 굉장한 체험 속에 담긴 여러 가지 교훈을 우리가 어떻게 살리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88 올림픽을 매우 훌륭하게 치렀으나,그 당시에 보여주었던 우리 민족의 역량을 후일에까지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부족해 그 절호의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쉬 더운 방이 쉬 식는다'는 속담을 뛰어넘지 못했던 것이다.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02 월드컵'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지도자가 중요하다는 것과 탁월한 지도자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명백하게 보여주었다는 그것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4강 진출'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둔 가장 큰 이유는 히딩크라는 외국인 감독의 탁월한 지도력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지도력의 첫째 요체(要諦)는 선수를 선발함에 있어서 정실(情實)과 사심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로지 실력만을 중요시한다는 원칙이다. 둘째 요체는 주도면밀한 과학적 연구에 의한다는 점이다. 그는 결코 주먹구구로 감독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셋째 요체는 선수들을 사랑함으로써 그들과 친구가 된 인화(人和)의 원칙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의 지도자들을 생각하게 된다. 지도자들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큰 정치계의 우두머리는 사람을 쓸 때 정실과 사심을 배제하고 오로지 실력만을 고려하는가,지연과 학연에 좌우되지 않는가, 자기가 맡은 일을 감당하기에 필요한 실력을 쌓기 위해 연구에 몰두하는가,입만 살아서 말잔치에만 능한 정치가는 없는가, 겸허한 마음으로 국민을 사랑하는가,권위주의에 물들어 군림하는 사람은 없는가. 다음에 떠오르는 것은 교육 현장에 있어서의 지도자 문제이다. 교육 현장에서 지도자의 임무를 맡게 될 훌륭한 교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교사들은 교육자로서의 실력을 쌓기 위해 연구와 인격 연마에 진력하고 있는가. 교사들은 학생들을 사랑하여 그들과 친구가 되기를 꾀하고 있는가. 국가 장래는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교육에 달렸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윤리교육의 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교육행정의 수뇌부는 슬기로운 교육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맡아야 할 것이며,교육자를 직업으로 택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생계를 위한 수단을 넘어서 스승다운 스승이 되고자 하는 사명감에 투철해야 할 것이다. '붉은 악마'들이 주도하는 거리의 응원 풍경이 그 열기와 질서정연함으로 인해 많은 화제를 뿌렸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애국심과 질서의식을 찬양한 언론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군중심리가 지배하는 응원 속의 애국심이,나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평소의 애국심으로 직접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응원의 마당에서 쓰레기를 청소한 젊은이들이 평상시에 공원이나 길거리에서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혈기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교육'의 손길이 가해져야 한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인의 체질과 성격 속에 탁월한 소질과 무한한 가능성이 숨어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의 혈관 속에 잠재해 있던 용광로 같은 에너지가 2002 월드컵을 계기로 활화산이 되어 분출한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숨긴 이 귀중한 에너지를 올바른 채널(水路)로 유도해 내일의 국가 발전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은 넓은 의미의 '교육'이 해야 할 일이다. 축구 강국이 되는 것이 우리들 본래의 목적은 아니다. 우리들의 본래 목적은 정치와 경제를 비롯해 문화 전체에 있어서 자랑스러운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다. 2002 월드컵의 성공이 더욱 큰 목적으로 접근하는 유력한 디딤돌의 구실을 하도록,이제부터 우리가 힘을 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