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 사회에선 모든 분야에서 자유화가 꾸준히 추진됐다. 시장들이 외국의 상품,기술,자본,그리고 인력에 대해 상당히 넓게 개방된 것은 특히 중요한 성과다. 지금 우리 사회가 보이는 활기는 그런 자유화에 크게 힘을 입었다. 유일한 예외는 정치시장이다. 외국인들이 기업의 최고경영자나 교향악단의 지휘자나 스포츠 팀의 감독을 맡는 일은 이제 흔하다. 그러나 정치지도자 자리는 내국인만이 차지할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해졌다. 다른 분야들에선 크게 이롭다고 판명된 자유화가 왜 정치시장엔 적용될 수 없는가? 잠시 생각해보아도 우리는 정치시장을 폐쇄적으로 유지할 까닭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실은 정치시장을 자유화해 외국인들도 우리 정치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이유들이 여럿 있다. 첫째,선택의 폭을 늘리는 것은 언제나 소비자들에게 이롭다. 정치적 지도력도 예외가 아니니,전 세계를 대상으로 삼아 정치적 능력이 증명된 사람들 가운데서 정치지도자를 뽑을 수 있다면,우리 사회는 큰 이득을 볼 것이다. 실제로 그들 가운데서 뽑아야,그런 이득을 보는 것도 아니다. 경쟁자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독점 기업의 행동에 건전한 제약을 주듯 국민들이 외국인을 지도자로 뽑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우리 정치 풍토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둘째,부패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는 부패 형태는 '정실주의(nepotism)'다. 그것은 사회의 기본 질서와 정의를 근본적 차원에서 훼손한다. 어떤 정치인이 정치지도자가 되려면,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정치지도자가 되면,그는 필연적으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바로 그런 정실주의가 정치지도자로선 헤어나기 어려운 부패의 늪이다. 실제로 현 정권의 가장 큰 부패는 '지역 편중 인사'라고 불린 것이지,'게이트'라고 불리는 자잘한 추문들이 아니다. 외국인 후보의 경우 자신이 이미 얻은 명성 덕분에 당선되었으므로,추종자들에게 진 빚에 눌리거나 정치자금을 댄 이익 집단들의 포로가 될 까닭이 없다. 셋째,내국인 후보는 어쩔 수 없이 지연 혈연 학연에 얽매이지만,외국인 후보는 그런 인연들로부터 자유롭다. 이념의 편차가 크고,지연과 학연으로 갈라지고,이제는 세대 사이의 대립까지 걱정되는 우리 사회에서 이것은 큰 장점이다. 넷째,정치 일정에 맞추어 경제를 운용할 위험이 적다.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정당이 아니므로,외국인 지도자는 선거를 고려해 경제를 운용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정말로 흥미로운 것은 명성 높은 외국인 지도자가 지닐 외교적 프리미엄이다. 우리 내국인 대통령이 국제 외교무대에서 누리는 인지도나 명성은 아주 낮고,자연히 다른 나라 지도자들과 친숙하게 되는 과정에서 치르는 비용은 작지 않다. 만일 강대국에서 업적과 신뢰를 쌓았고,서양에 두터운 인맥을 가진 사람이 우리 정치 지도자가 됐을 경우 무기 구매나 외교적 마찰과 같은 문제들에서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여지는 지금보다는 훨씬 클 것이다. 외국인 지도자가 내국인 지도자보다 아무래도 애국심에서 약하리라는 걱정이 나오겠지만,그것은 기우다. 이번 월드컵 경기에서 16강에 진출시킨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 사람이라는 사실이 잘 보여주듯 이런 일에서 직업의식과 직업윤리는 다른 고려 사항들을 압도한다. 미국에서 헨리 키신저처럼 귀화한 사람들이 국무장관을 지냈다는 사실도 음미할 만하다. 위의 얘기는 지금 우리 나라를 이끄는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를 논거로 삼지 않으며,그들의 자질과 관계 없이 유효하다. 오히려 지금 우리 정치의 근본적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정치 지도자들의 낮은 자질이 아니라,정치시장 자체의 폐쇄성임을 일깨워준다. 10여년 전 정치시장의 자유화는 비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그동안 세계화는 급격히 진전됐고,우리 국민들도 자유화를 훨씬 긍정적으로 여긴다. 이제 정치에 관한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정치시장의 자유화를 진지하게 논의할 때가 됐다.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