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은 98 프랑스 월드컵대회를 소재로 한 영화다. 배경은 문명과 동떨어진 티베트의 한 사원.막이 오르면 새벽 예불소리 은은한 가운데 스님들의 소리없이 분주한 모습이 나온다. 향을 피우고 마당 쓸고 물 긷고.잠시 후 카메라는 승복을 입은 채 찌그러진 콜라캔을 차는 어린 수도승들을 비춘다. '오기엔'을 비롯한 동자승들은 월드컵 경기를 보기 위해 몰래 TV가 있는 동네로 내려가다 들키자 결승전은 사원에서 보자고 조른다. 노스님은 월드컵에 미쳐 규율을 어기고 공부를 게을리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고, '컵' 하나 때문에 싸운다는 것도 이상하기만 하지만 청이 간곡한 만큼 들어주기로 한다. 허락은 받았지만 TV를 빌려오는 데 필요한 돈이 모자라자 오기엔은 꼭 돌려주겠다며 동료의 회중시계를 갖다 잡힌다. 마침내 절에 TV가 설치되고 지지직거리던 낡은 TV는 프랑스와 브라질의 결승전을 보여준다. 조계종 최대 수행사찰로 '하안거'(夏安居ㆍ음력 4월 보름 다음날부터 7월 보름까지)가 실시되고 있는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도 10일 한ㆍ미전은 모든 스님들에게 관전을 허용했다고 한다. '한국전은 보게 해달라'는 스님들의 요구가 간절했던 데다 10일이 마침 음력 4월말로 수행 없이 법문을 행하는 날이어서 용인했다는 것이다. 여름안거에 들어가면 원래 일체의 움직임을 자제한 채 수행에만 정진해야 하지만 '16강 진출'이라는 국민적 염원에 동참하려는 스님들의 열망 앞에 예외를 인정한 셈이다. 영화 '컵'은 첩첩산중에까지 불어닥친 월드컵 열풍을 통해 세대간의 화해와 소통,전통과 외래 문화의 마찰과 조화, 사람살이의 도리와 지혜 등을 설득력있게 전달,'포스트 98프랑스월드컵'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해인사 여름안거와 월드컵'은 '컵'보다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소재다 싶거니와 새벽 3시면 도량석(道場釋·새벽예불 전 목탁을 두드리며 경내를 도는 의식)에 맞춰 일어나 면벽수행하는 스님들의 경건하면서도 열띤 응원이 남은 한국전에도 큰 힘을 불어넣기를 두 손 모아 빈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