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기 < 숙명여대 일본학과 교수 > 전후 처음으로 장기간의 불황을 겪으면서 지난 10년간 일본의 소비 문화에도 주목할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한 나라의 소비 문화는 세대에 따라, 또 경제.사회 발전 단계에 따라 다양하기 때문에 간단히 표현하기 어렵지만 최근 일본 소비 문화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본으로의 회귀'가 아닐까 싶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명한 소비자로의 복귀를 뜻한다. 즉 분수에 맞추어 절제할 줄 알고 가치와 질을 중시하는 현명한 소비자로의 복귀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일본의 소비자들은 그동안의 소비 및 정보 경험을 축적해온 결과 소비 감각이 매우 세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버블 경제기에 한 때 모험적인 고급소비 성향이 반짝하기도 했으나 상품 및 서비스의 질이나 가격에 대해서는 엄격한 판단 능력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장인(匠人)의식이 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분수를 지키는 이른바 '토신다이(等身大)소비'는 일본의 전통적인 소비 덕목이기도 하다. 최근의 변화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통적인 덕목이 재강조되는 가운데 자기지향, 가치지향 등이 더욱 강조됨을 뜻한다. 먼저 자기지향성을 예로 들어보자. 최근 일본의 소비 문화를 주도하는 30세 전후의 이른바 '단카이(團塊) 2세'들은 지난 60,70년대 고도성장기 소비.판매의 집단화를 주도했던 그들의 부모세대, '단카이 세대'와는 다른 성향을 보이고 있다. 아무리 유행하는 상품이라도 냉정한 눈으로 비평을 하며,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의 주장을 제품 구매에 반영하는 것이 이들의 모습이다. 최근 단카이 2세들의 지지를 받아 유행한 대표적인 상품 가운데 하나가 도요타자동차의 모델인 '비츠'이다. 부가기능이 별로 없으면서도 콤팩트한 디자인으로 승부를 걸어 성공한 사례이다. 특히 디자인과 색상 등 다양한 옵션을 소비자가 자기 개성대로 주문할 수 있어 단카이 2세들의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둘째, 가치지향의 성향이다. 이것은 소비자들이 제품의 값어치를 철저히 따져보고 구매함을 의미한다. 90년대 후반 일본 패션 유통업계에 돌풍을 몰고 온 유니크로의 성공은 이러한 소비 문화에 적절히 편승한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들여온 저가 의류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일본인들이 유니크로가 신소재와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인 중국산 캐주얼 의류에는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다. 저가격에 걸맞지 않은 고품질에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절제와 검약을 덕목으로 하는 일본인의 소비문화는 더욱 강한 힘으로 제조 기업과 유통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다. 일본이 아무리 소비가 미덕인 고도 소비사회로 이행한 것처럼 보여도, 제품에 대한 일본인의 철저한 장인 의식은 과거보다 오히려 더욱 세련되고 고도화 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소비자들의 세련되고 엄격해진 잣대에 부응하지 않으면 기업도 살아남기 힘든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일본 소비자들은 지금 상품에 대한 엄격한 가치관을 한층 더 세련됨으로 무장해가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건의 가치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 이것이야말로 일본인들의 합리적인 소비를 뜻하는 것이며 이같은 합리성은 여전히 소비문화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 kwonhk@sookmyung.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