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경제부처 수장들의 환율 하락 용인 발언이 이어지며 달러/원 환율이 연중 최저치를 거듭 경신했다. 시장은 정부의 외환 정책이 '환율 하락'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으로 인식하는 모습이다. 이 인식의 근간에는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과 수급상황 등 내부적인 요인과 함께 미국 달러화 약세라는 외부의 힘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 당국의 환율하락 용인은 수출보다는 물가 안정 쪽으로 정책 방향이 기울어 있는데 따른 것으로 판단된다. ◆ 급락 부채질 발언 = 외환시장에서 정부 고위관계자의 발언은 '말이 씨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환율은 거시경제지표 중의 하나이자 수출과 밀접한 관련이 깊어 외환정책을 관장하는 재정경제부와 수출 주무부처인 산업자원부 수장의 발언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이날 전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환율은 일반적으로 그 나라의 경제현황을 반영한다"며 "현 수준의 환율은 우리 나라 경제실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언급, 하락을 용인하겠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재경부는 '예의주시와 적절한 조치'라는 구두개입에 나서 연중 최저치 경신 행진에 나서고 있던 환율에 제동을 걸었다. 두 발언은 얼핏 '엇박자'가 아니냐는 인식이 나올 만큼 차이가 컸다. 이와 관련, 재경부 국제금융국 관계자는 "전 부총리의 발언은 환율이 일국의 경제 실상을 반영해서 움직인다는 원론적인 얘기"라며 "최근 환율 움직임에 대해 깊이있는 견해를 표현한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전날에는 신국환 산업자원부 장관이 환율 급락을 자극하는 발언으로 시장에 충격을 가한 바 있다. 미국과의 통상마찰 해결을 위해 뉴욕을 방문중인 신 장관은 경제연구소들의 추산임을 전제로 "하반기 환율이 1,250원대로 하락할 것"이라며 "환율 하락이 국내 수출업체들의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다"고 강조, 환율 하락을 용인할 뜻이 있음을 시사했다. 산자부 수출과의 한 관계자는 "환율 하락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함께 있음을 지적한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기업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얘기다"고 설명했다. ◆ 수출보다 물가 잡기 인식 = 연이어 나온 부총리와 산자부 장관의 발언에 대해 '원론적인' 인식이라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이는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정부 내부의 거시경제 정책 운용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는 관측을 낳고 있다. 즉, 최근 급락이 한국 경제의 견실한 경기회복세와 맞물려 자연스러운데다 추가 금리인상이 부담스런 상황에서 향후 물가상승에 대한 불안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효과가 있다는 것. 최근 원화 강세는 전 세계적인 달러화의 약세 흐름속에 편입된데다 한국 경제펀더멘털의 견조함을 배경으로 한다. 전 부총리의 발언은 한국 경제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함과 동시에 충분히 현 환율 수준을 감내할 수 있다는 자심감을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반도체 가격 하락 등 미온적인 수출 회복에 대한 우려감도 있으나 최근의 환율 급락이 당장 수출을 나락으로 떨어뜨리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원화뿐 아니라 경쟁국인 일본의 엔화도 속도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강세를 보이고 있는 까닭이다. 산자부는 이날 '최근 환율 동향과 수출에의 영향'을 통해 "환율 하락은 아직까지는 큰 영향이 없어 보이지만 급속 하락시 수출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우려된다"며 "엔/원이 10대1 수준을 유지하면서 영향이 덜한 상태지만 향후 원화 강세가 엔화 등에 비해 큰 폭으로 진행되면 우리 제품의 가격경쟁력 약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말했다. 시중은행의 한 딜러는 "최근 환율이 밀리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며 "왜냐하면 엔/원이 1,000원 아래긴 하나 안정적으로 움직이고 다른 아시아 통화도 비슷한 패턴이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하반기 물가에 대한 점증하는 불안도 환율 하락에 대한 정부의 인식을 좀 더 느슨하게 풀어줄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 이날 한국은행이 발표한 4월중 가공단계별 물가동향에 따르면 원재료와 중간재 가격이 전달에 비해 2.5%나 상승, 이들이 인플레이션 선행지표임을 감안하면 하반기 물가 압박이 거세질 것임을 예고했다. 또 6월 지방선거를 비롯한 정치 일정과 하반기 지하철 등 공공요금 인상, 유가 오름세 등의 변수가 곳곳에 포진해 있고 최근 통화가 많이 풀려 총유동성(M3)이 정부의 억제목표선(8∼12%)을 넘어섰다는 점도 부담이 되고 있다. 이달 초 기습적인 금리인상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경기회복에 이르지 못했음을 감안하면 추가 금리 인상의 부담보다는 환율 하락 쪽에 보다 '매력'을 느낄 가능성이 있다. ◆ 속도조절 가능성 = 지난달 12일 1,332원까지 연중 최저치를 기록한 뒤 5주동안 환율은 무려 60원 가량 빠졌다. 그동안 반영하지 못했던 펀더멘털의 뒷받침이 있었고 이틀동안 잇따른 경┷光?수장들의 발언이 달러매수세를 더욱 위축시킨 셈. 시장은 이러한 발언이 '원론적인' 것임을 알지만 개입을 희석화시키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원화의 일방적인 강세 독주가 아닌 상황에서 정부나 외환당국의 개입도 '속도조절'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재경부 관계자는 이날 급락과 관련, "심리적인 동요라기 보다는 미국 달러화 약세 흐름과 수급상황에 따른 것"이라며 "한국은행과 현재 환율에 대한 인식은 같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곧 시장 흐름을 거스르는 조치를 취하기보다는 전반적인 변수를 감안, 하락속도가 지나친 것을 막겠다는 의사로 풀이된다. 시중은행의 한 딜러는 "부총리 발언은 원론을 얘기하면서 거시경제 차원에서 트렌드를 설명했다"며 "한국은행이나 실무 관계자는 트렌드 안에서도 수급 조절 등의 미시적인 문제까지 고려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큰 그림으로 하락 대세를 인정하면서 수급 등으로 속도를 조절하는 차원의 소극적인 방어가 있을 것이란 예상이다. 하락 속도의 조절에 대한 정부의 심중 계산에 열중하고 있는 시장 참가자들은 현재 1,260원대 환율이 깨지면 1,250원대까지 흘러내릴 여지가 충분하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수급상으로도 뚜렷하게 공급우위가 지속되고 있는 최근 현실에서 바닥 확인은 결국 외환당국의 의지와 행동에 달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경닷컴 이준수기자 jslyd01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