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해 "삼성전자가 소니를 앞지를 것"이라는 기사가 언론에 보도되자 "소니를 자극하는 발언을 절대 하지 말라"며 관련자들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이데이 노부유키 회장을 비롯한 소니 경영진과 만났을 때는 문제의 발언을 한 간부에게 사과까지 시켰다. 그는 "앞으로도 소니와 협력할 일이 많은데 이익이 좀 났다고 상대방을 자극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가 다른 기업과의 제휴와 협력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삼성전자의 성장사는 사실상 제휴와 협력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은 1969년 일본 산요전기와 합작법인을 설립하면서 처음으로 전자산업에 뛰어들었다. 삼성전기는 산요와,삼성SDI는 NEC와,삼성코닝은 미국 코닝사와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고 발전했다. D램 휴대전화 등 주요 사업들의 고비고비마다 미국과 일본의 협력업체들이 '조연자'로 등장한다. 크고 작은 제휴와 기술협력이 뒤늦게 출발한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었다. 삼성전자의 새로운 '캐시카우(큰 이익을 내는 사업)'로 부상한 휴대전화사업은 올해 업계 3위로 발돋움할 전망이다. 휴대전화사업은 지난해 1조2천억원의 이익을 올렸고 올해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휴대전화사업의 성공은 CDMA(부호분할다중접속) 휴대전화용 칩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통신용 반도체회사 퀄컴과의 협력이 배경이 됐다. 90년대 초 유럽형 이동전화방식인 GSM이 세계시장을 휩쓸고 있을 때 퀄컴은 CDMA 휴대전화와 각종 장비가 개발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시장개척기였던 만큼 빨리 그리고 믿을 만한 품질의 제품이 나와야만 했다. 삼성전자는 리스크를 떠안으며 적극 사업에 나서 퀄컴의 기대수준에 맞는 CDMA 휴대전화를 제일 먼저 시장에 내놓았다. 그 결과 CDMA시장이 자리를 잡았고 퀄컴도 세계적 회사로 발돋움했다. 삼성전자 역시 이를 발판으로 지난 94년 미국에 처음으로 휴대전화기를 수출한 이후 10년도 안 돼 세계 굴지의 휴대전화업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와 퀄컴은 이와 잇몸의 관계처럼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 삼성전자도 다른 업체들처럼 5%대의 높은 로열티를 물고 있지만 퀄컴은 새로운 칩이 개발되면 제일 먼저 삼성으로 가져 온다. 그만큼 시장에서 앞서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CDMA 휴대전화업계 1위인 삼성에서 좋은 제품이 나와야 퀄컴의 수입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윈-윈(win-win)전략'의 대표적 사례다. 램버스 D램의 경우는 삼성전자의 실용적인 제휴전략을 잘 보여준다. 미국 램버스는 독창성을 주장하기 어려운 기술로 광범위한 특허를 얻어 지난 2000년 D램 업체들에 로열티를 요구했다. 인피니언과 마이크론 하이닉스 등 경쟁업체들은 램버스의 주장이 말도 안된다며 소송을 걸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한 해에 1천5백만달러씩 3년간 4천5백만달러나 되는 소송비용을 물며 소송에 힘을 낭비하느니 약간의 특허료를 내고 조기에 사업화하기로 결정했다. 램버스로서는 삼성전자가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다. 초고속 램버스D램 사업에 램버스의 적극적인 협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더구나 지난해 램버스가 인피니언과의 소송에서 패해 삼성전자도 더 이상 특허사용료를 내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는 인텔과도 전략적 제휴를 맺고 펜티엄4 CPU를 지원하는 램버스D램 시설 자금 등을 지원받았다. 삼성전자는 램버스D램 시장의 50∼70%를 차지하면서 지금까지 20억달러 이상의 매출과 5억달러 이상의 이익을 올렸다. 이건희 삼성 회장도 이렇게 강조한 적이 있다. "1억원만 주면 1주일 만에 가져올 수 있는 기술을 10억,20억원 들여서 3∼5년씩 걸려 개발하는 것은 낭비다.5%의 기술료를 주고 노하우를 들여와 10%의 이익을 내면 된다."(93년7월)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는다. 통신용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위해 같은 휴대폰업체인 에릭슨으로부터 블루투스 핵심기술을 도입했다. 노키아에는 차세대 제품인 정보단말기 겸용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D램을 공급하고 있다. 반대로 제휴협력관계를 맺은 업체의 핵심영역도 미래 유망사업분야라면 과감히 도전한다. 인텔이 장악하고 있는 CPU,퀄컴의 통신용 반도체 등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동지'도 결국엔 세계 최고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략적 제휴는 절대 배타적 관계로 맺지는 않는 게 삼성전자의 제휴원칙이다. 한쪽에서의 협력이 다른 쪽 사업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제휴를 각 분야 선두권 업체들과 하는 것도 삼성전자의 전략이다. '강한 기업들끼리 서로 협력해 새로운 1등이 되자는 전략'이라고 김현덕 경영기획팀장(전무)은 소개했다. 과거에는 보완관계를 지향하는 제휴가 많았으나 1∼2위권의 기업만이 살아남는 환경이 되면서 1∼2등이 더 잘하기 위한 제휴를 한다는 것. 삼성전자는 가전 디지털미디어 통신 반도체 등 사업범위가 전방위에 걸쳐 있어 많은 업체들과 제휴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각 사업부문에서는 기존사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회사차원에서는 미래사업 강화를 위해 제휴를 추구한다. 일본 소니와는 5년 전부터 회사전반의 경영전략을 논의하고 있다. 1년에 두 차례 양국을 오가며 윤종용 부회장과 이데이 회장이 사장단을 대동해 만난다. △5∼10년 뒤 산업전망 △경제환경 변화 △기술예측 등에 대해 논의하고 전략설정 방향도 공유한다. 올해로 17년째인 도시바를 비롯해 NEC 샤프 등과도 최고경영자 교류회를 갖고 있다. 이 교류회에서 사업 아이디어가 논의되면 간부들과 실무진들이 각각 만나 세부방안을 논의한다. AOL타임워너사와의 전략적 제휴는 미래에 대비하는 광범위한 성격의 제휴다. AOL타임워너는 미국내 인터넷서비스망과 영화콘텐츠 등 삼성전자가 갖고 있지 않은 강점을 보유한 세계적 기업. 여기에다 삼성전자의 제품과 기술을 결합시키려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최근 삼성전자에는 세계적 업체들의 제휴요청이 더욱 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IBM 등은 각각 '닷넷' '그리드' 등 '유비퀴터스 네트워크(Ubiquitous Network)'사업을 함께 추진하자고 요청했다. 이 사업은 홈네트워크나 오피스네트워크 모바일네트워크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공간이나 수단의 제한없이 각종 정보기기를 연결할 수 있는 차세대 네트워크 사업. 삼성이 디지털융합에 필요한 모든 사업분야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선진업체들로부터 홀대를 받았던 것과는 딴판이다. 김성택 기자 idntt@hankyung.com ◇특별취재팀=이봉구 산업담당부국장(팀장),강현철,이익원,조주현,김성택,이심기,정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