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갑자기 50인의 지도적인 물리학자·화학자·생리학자·수학자·기술자 등 3천명에 이르는 석학,예술가,기예(技藝)자들을 잃었다고 하자.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인가. 프랑스가 혼이 없는 육체가 되는 대재난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 대신 사회적 상층부를 몽땅 잃는 일격을 당했다고 하자:왕의 형제,드 베리 공,공작부인 몇분,왕실의 관리들,장관들,판사들,가장 부유한 지주 1만명- 이렇게 3만명을 잃었다고 하자.그 결과는 가장 가슴아픈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실된 것은 단지 감상(感傷)일 뿐이고,그로 인해 국가가 고통받는 바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사랑스러운 장식품들은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도 채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노동 지배계급 타파를 선동하는 데 자주 이용되는 생시몽(Saint-Simon)의 유명한 글(Parable,1810)이다. 모 대권주자 후보가 '과거'에 했다는 발언-잘났다는 대학교수,국회의원,사장님이 어느날 모두 죽어버리면 남은 노동자들이 꾸려나갈 것.그러나 노동자가 염병으로 모두 자빠지면 이 사회는 그날로 끝,운운하던 것-과 의도와 틀이 똑같다. 18세기의 프랑스는 정치 경제 문화에 있어서 세계를 주도했다. 파리가 유럽의 심장이었으며,영국은 변방에 불과했다. 유럽의 지식인이란 프랑스어로 쓰고 말하고,프랑스에 건너가 볼테르,몽테스키외,백과사전학파들과 한번 만나본 사람들이었다. 브리튼 섬에서는 그나마 프랑스의 정치적 영향력 하에 있어서 왕래가 잦던 스코틀랜드가 문화선도지로 행세하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19세기에 접어들며 순식간에 판도가 역전됐다. 프랑스에서는 1789년의 대혁명 이래 생시몽 말고도 과격 사회주의자들이 줄을 이었다. 바베우프(Gracchus Babeuf)라는 선동자가 나타나 평민선언(Plebian Manifesto)을 내걸고 '태양은 모두에게 똑같이 비친다'는 구호를 외쳤다. 그는 '모두가 생산한 것을 하나의 의혹도 없이 평등적으로 분배하는 제도를 세우자'고 선포하고,정부 전복을 기도하다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1848년의 공산당 선언과 4월 혁명,1871년의 파리 코뮌(Commune of Paris)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에서는 평등주의자들이 이끈 정치 사회적 소용돌이가 그칠 날이 없었다.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는 불붙는 산업혁명아래 생산력과 기술을 일신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우리가 간과하는 점은 이때 영국이 그 물적체제의 구축과 함께,그에 상응하는 제도적 이념적 기반을 획기적으로 확충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성보다 열정에 기초해 사회개조와 무절제한 행동을 부추기는 사상이 프랑스를 뒤덮을 때 영국은 합리와 시의(時宜)에 기초를 둔 정치경제사상과 지식을 본격적으로 발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뒷날 황제가 프러시아에 잡혀가고 수도가 나치에 점령당하기까지 프랑스가 경험한 패배와 굴욕은 국민들이 이때의 시대착오적 행태를 용인한 값을 치른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오늘날의 한국은 19세기의 영국에 비견할 바의 국제적 세력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나름대로 산업기반을 구축해 세계에 한국인의 리더십을 과시할 호기를 맞고 있다. IT산업은 증대되고,첨단 인프라는 확충 일로에 있어 산업경쟁력 제고와 외국인투자 유치에 누구하고도 선두를 다툴 태세로 뛰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사회의 구석마다 무질서와 평등주의가 상호 부식(扶植)하고 있다. '평준화'가 국가의 공식 정책노선이 돼있고,정치인은 민생(民生)의 일이라면 질서파괴도 부추긴다. 수시로 불법총파업 위협이 일고 있는데,이런 일이라면 선생님들조차 수업을 팽개치고 가담하겠다고 나선다. 우리 민족은 원래 평준을 좋아해서,남이 하고 내가 못하는 꼴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치가들에게 포퓰리즘처럼 잘 먹히는 수단이 없고,불법과 무질서는 이 틈에 기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 이상의 '시대 착오'란 있을 수 없다. 5년에 한번 우리는 '대권 가진 자를 뽑을 권리'를 행사한다. 그 후보 검증과정은 치열해야 하며 누구도 회피하거나 무심해서는 안된다. 시민들이 실로 정치에 관심을 두어야 할 때인 것이다. kimyb@c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