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P 창업자의 한 사람인 고(故) 윌리엄 휴렛의 아들 월터 휴렛은 요즘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다. HP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그가 HP의 컴팩 인수 반대 투쟁을 이끌기 때문이다. 그는 이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는 '무명'이었다. 부친이 남긴 유산(HP 주식)을 소유한 복지재단을 운영하면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HP의 칼리 피오리나 회장이 지칭한 대로 그는 '음악가이면서 학자'였다. 그런 그가 경영진과의 싸움을 지휘함으로써 '경영진 반대파'의 표상이 되고 있다. HP의 컴팩 인수승인을 위한 주주총회가 끝난 후에도 반대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그가 주주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외이사 제도 자체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 사외이사 제도는 투명경영의 중요 축으로 인식되고 있다. 지난 80년대 후반부터 활성화된 이 제도는 주주를 대신해 경영진을 견제하고 투명한 경영을 보장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휴렛씨는 이 제도가 제 기능을 못한다고 지적했다. 사외이사들이 경영진의 계획에 반대하고 나서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내세웠다. "미국기업의 사외이사들은 고립돼 있고 경영진에게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며 "많은 기업의 이사회 회의장에는 민주주의가 통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외이사 제도 개혁을 위한 몇가지 대안도 내놓았다. 경영진들을 배제한 가운데 사외이사들끼리의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는 한편 경영진과 연계를 갖고 있지 않은 법률 및 금융 전문가의 자문을 받는 것 등이다. 아무래도 면전에서 반대하고 나서기 어려운 게 인지상정인 만큼,경영진이 없는 곳에서 사외이사들끼리 모인다면 보다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휴렛씨의 주장이 한국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IMF 위기 이후 도입된 이 제도가 갓 뿌리를 내리고 있는 단계여서 '사치'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제도가 하루빨리 제자리를 잡도록 하기 위해서는 귀 기울여볼 만한 대목일 것이다. 실리콘밸리=정건수 특파원 ks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