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울 때 들어와 좋을 때 나가니 나는 정말 복받은 사람입니다"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가 29일 기자들에게 밝힌 소감이다. 그는 무디스가 신용등급을 두 단계나 올려 외환위기로 짓밟인 국민들의 자존심을 되살린 것을 '퇴임 축하선물'이라며 감격해했다. 전 총재는 "지방대 교수출신이 대과(大過)없이 임기를 무사히 마친 것만 해도 명예롭게 생각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21대 전 총재는 한은 52년 역사에서 임기를 채운 5명중 하나이고 김건 총재(92년) 이후 10년만이다. 한은 직원들은 돈을 갹출해 금 10돈짜리 행운의 열쇠를 만들어 전 총재 이임식(30일)때 전달키로 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한은법 파동으로 회의실의 초상화조차 4년만에 겨우 걸렸던 전임 이경식 총재와는 대비된다. 전 총재가 처음부터 안팎의 존경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태권도 농구 등 운동을 많이 했고 턱이 길어 별명이 '이노키'였다. 22년간 지방(충남대 교수)에서만 지내 투박하고 우직한 선비 이미지였다. 앨런 그린스펀 미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과 자주 비교돼 "발언이 세련되지 못하다"는 비판도 많았다. 한은의 한 간부는 "전 총재가 '컨트리풍(촌스러워)'이어서 국제회의 때마다 혹시 실수할까봐 졸졸 따라다녔는데 의외로 외국 중앙은행 총재들과 허물없이 지내더라"고 귀띔했다. 그린스펀 의장은 전 총재를 '철∼후완'이라며 직접 이름을 부른다. 그의 강점은 바로 투박하고 우직한 데서 나왔다. 무엇보다 정부 장관자리등 한눈을 팔지 않았다. 구조조정의 어려운 시기에 정부의 국채 인수나 외환은행 출자요청을 거부해 원칙과 일관성을 지켰다는 평가도 받는다. 한 직원은 "역대 총재들이 의전에 신경쓴 데 반해 전 총재는 내용만 챙겼다"고 평가했다. 지금도 집에선 프라이드를 손수 운전하고 골프 대신 독서에 몰두하며 재임중 두 아들의 결혼식을 비서들도 모르게 치렀다. 전 총재는 평소 소망대로 퇴임뒤 '4평짜리 서재'를 얻게 됐다. 한은은 그를 고문으로 예우하고 강남지점에 사무실도 마련해줬다. 그는 앞으로 한학이나 경제관련 고서를 번역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과 힘을 합치면 1년에 50권쯤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내가 소장한 경제학 고전의 초판들도 죽기전에 모두 한은에 두고 갈 생각입니다" 전 총재는 이날 저녁 경비원 노조 퇴직직원들과 술잔을 기울였다. "30일엔 이임식만 간단히 치른 뒤 빨리 나가겠다"며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오형규 기자 ohk@hankyung.com [ 전철환 총재 주요일지 ] △3월6일 21대 총재 취임 △9월 총액대출 한도 확대 △1월 월간 경제교실 개최 △5월 통화관리 금리위주로 전환 △6월 일본과 50억달러 통화스와프 체결 △5월 기업 구매자금대출 시행 △6월 유동성대출제도 시행 △9월 일중 당좌대출제도 시행 △2월 국고채 과열투기 경고 △2월 전자방식 외상매출채권담보대출제도 시행 △4월 외환시장 개입 △7∼9월 세차례 콜금리 인하 △8월 IMF차입금 상환 완료 △3월30일 퇴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