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를 돌아볼 때 안타까운 점은 부(富)의 소유 정도나 사회적 지위와 달리,사전적의미를 정당하게 부여할 수 있는 지도층이 두텁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구성원의 의사를 장기적 전망 속에서 민주적으로 결집해 추진하는 지도층이 두텁지 못하면 구성원의 미래도 밝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83돌이 지나면서 이제 역사적 자산이 된 '3.1운동'의 의미는 미국의 외교정책으로 제창된 민족자결주의나 '열국의 자비심' 또는 '일본의 이성'에 기대어 독립을 '청원'하는 성격이 짙은 기미독립선언문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 대부분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한문투의 선언문을 읽고 시위에 나선 것이 아니었다. 3.1운동은 식민지 지배를 거부하고 계층의 차이를 넘어 두달 이상 전국적으로,당시 인구의 10%에 해당되는 2백여만명이 참가한 거족적 민족운동이었다. 4만6천여명이 검거됐고, 1만6천여명의 부상자와 7천5백여명의 대학살이 수반됐다. 일제의 공식집계에 따르더라도 가족이나 일가친척중 시위에 직접 참가하거나 검거 또는 다치고 죽은 사람이 한 두 사람씩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이 운동이 미친 유무형의 영향력이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나라를 빼앗길 당시에는 대한'제'국이었고, 이후 임금의 나라를 되찾자는 복벽의 목소리가 남아 있었지만, 3.1운동 후 전 민족의 여망에 부응해 성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칭은 그냥 붙여진 것이 아니었다.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사람들의 의식이 그만큼 바뀌면서 성장한 것이다. 대한제국이나 황제에 대한 정서적 아픔은 고종의 장례식을 3.1운동 거사의 계기로 삼는 요인이 됐다. 그러나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한 망조(亡朝)는 이미 다시 찾아야 할 나라가 될 수 없었다. 3.1운동을 생각하면서 뼈아픈 대목은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민족대표'들이 실제 역사의 현장에서 전개된 시위운동을 지도할 의지를 보이지 못했고, 나아가 석방 후에는 한용운 등을 제외한 대부분이 친일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사람의 마음은 변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사회적 측면에선 세계사에서도 흔치 않은 거족적 운동을 기반으로 한, 이전 사회의 황실이나 양반들을 대신할 새로운 사회리더십의 형성에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역사의 안타까움이 있다. 실제로 1920년대 이후 부유층이나 상당수 지식인들은 식민지 지배를 받아들이면서 일제와 타협 또는 종속되면서 자기의 길을 모색했다. 1차적으로 일제의 식민통치가 그럴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국내에서 활동하던 '지도자'들은 스스로 쌓은 경륜을 통해 민족적 리더십을 갖기 어려웠다. 해방 후 우리 사회의 '지도층'들이 스스로의 지도력보다 외세나 냉전체제에 편승하면서 자기 세력을 구축해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흔히 영화에서 보듯이 일본헌병은 서서 쏴 자세로 사격을 하고, 흰옷 입은 조선인 남녀노소는 한 손에 태극기 들고 무기력하게 숨져갔다거나, 이러한 모습을 두고 무저항비폭력운동이라고 이해한다면 이는 잘못된 역사상이다. 3.1운동은 평화 시위로 시작됐지만, 수원 제암리 학살과 같은 만행을 자행한 일제에 맞서 점차 폭력시위로 변해갔다. 민중들은 낫 괭이 몽둥이 등으로 무장하고 헌병대나 면사무소를 습격하면서 투쟁을 전개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무저항비폭력운동의 힘이 발휘되려면 지도부의 책임의식과 대중들의 지지라는 두 요소가 갖춰져야 한다. 만델라가 27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도 세련된 정치감각을 잃지 않고, 석방 후에도 포용적인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예다. 백인정권은 그를 없애고 싶었겠지만 그럴 경우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될 만큼 그에 대한 대중적 신뢰가 높았고,또 이를 바탕으로 만델라는 감옥 안에서 강력한 비폭력운동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자본주의 또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면서도 부자나 정치인이 존경받지 못하고 존경받을 수도 없는 '희한한 반사회적' 모순을 안고 있는 오늘 우리 사회의 병을 내면에서 성찰할 때다. < taehern@korea.ac.kr > -----------------------------------------------------------------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