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은 어수선하다. 동계올림픽에서의 '오노 쇼크'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 반미 감정이 그렇고,'악의 화신' 발언과 의사당 폭행시비 등으로 난장판이 된 국회가 그렇다. 정계는 여야를 막론하고 이미 과열조짐을 보이는 대권경쟁에 여념이 없고,다른 쪽에서는 '이용호 게이트'등 권력비리 사건들이 연일 신문지상을 장식한다. 그 와중에 고교재배정 사태에 이어 공공노조의 파업 등 바람 잘 날이 없다. 올해의 일정은 험난하다. 당장 6월의 월드컵대회나 대통령선거,지방선거를 치를 일이 까마득하다. 북미관계나 남북관계로 미루어 한반도 정세의 전개도 여간 근심스럽지 않다.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한 해를 시작하고 있으니 또 어떤 얼굴로 한 해를 보낼 것인가. 아무튼 연말이면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 놓고 있을 것이다. 누가 되든 새로운 정권이 탄생할 것이니 다음 정권이 미리 준비해서 실천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 정권이 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과제중 하나는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정치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다.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은 21세기의 격랑을 헤쳐 나가고 통일시대에 대비하기 위한 국가경쟁력의 요체가 되는 정치인프라를 구축하는 과제다. 대통령의 인척이나 측근실세들 중심의 사조직 비선정치에서 정규조직에 의한 공명정치로 전환하고,대통령의 민주적 리더십에 의한 국정운영시스템을 만들어 나가는 실천이 필요하다. 그 출발점은 권력분립,즉 국가권력간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국정을 운영하려는 실천적 학습에서 찾아야 한다. 권력분립이란 대학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법원리 중 하나다. 국가권력을 입법 행정 사법으로 나눠 각기 다른 기관에 맡기고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존 로크나 몽테스키외 같은 사람들이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이 원리가 오늘날 입헌민주주의를 자처하는 거의 모든 나라의 헌법에 제도화되게 된 소이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런데 권력분립의 원리도 따지고 보면 권력을 가진 인간에 대한 불신을 제도화한 것에 불과하다. 권력은 집중되면 독재와 부패를 낳기 쉬우므로 분리시키고 서로 견제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불신을 제도화하는 것이 그나마 권력의 배신으로 인한 사회적 파탄을 피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보면 그 권력을 쥔 자의 배신이나 타락으로 인한 권력투쟁,정치혼란,내전 등과 같은 비용을 계산해서 권력분립의 제도화에 따른 비용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과연 어느 경우가 더 비용합리적인지를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비록 계산은 안돼도 심각한 해악 때문에 권력분립이란 거래비용을 수반하는 제도적 기술을 채택하게 된 것이다. '민주적 중앙집중'의 원리에 따라 거대한 단일행정시스템을 구현하려 했던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권력의 합리화를 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헌법과 제도의 차원에서 인간에 대한 불신을 제도화한 최소한의 안전판이 권력분립이라면,정부의 역할은 그 불신의 제도를 확실하고 강력하게 실천해 안전판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불신의 제도화 효과보다는 그 제도화의 원인인 불신이 더 현실적이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국회가 그 본연의 입법권과 정책통제기능을 행사함으로써 행정부의 권력을 견제하고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가 그 제약하에서 국정을 수행하는 것은 입헌민주주의의 일상에 속하는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역대 어느 대통령도 그러한 일상을 용납하지 못했다. 대통령의 리더십과 권력의 전횡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국회를 대통령이나 정부의 종속기구로 사용하려는 고질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걸핏하면 국회를 개점휴업시키는 저질정치 대신에 토론과 협상에 입각한 합리적 국정운영방식이 필요하다. 차기의 리더십을 창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미리 마련하는 일도 합리적 국정운영시스템을 위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일이다. 단임제에 따른 정치의 단속성이나 시야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중임제개헌도 진지하게 강구해 보아야 한다. joonh2001@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