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에 사는 사람 중 바다가 가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도시인들은 원래 바다를 그리워하고 황금빛 주말이면 금방 거기로 뛰어가고 싶다고 생각하겠지만 특히 '우리의 서울'처럼 삭막하고 비생명적인 공간에 사는 사람들에겐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 훨씬 더 강할 것이다. 원시적 정령(精靈)과 오래된 숲이 보존된 큰 공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그나마 아름다운 한강이 사랑 받을 수 있는 일상적인 거리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강변도로를 만들어 시민으로부터 강을 밀어내듯 단절시키고 있는 것도 서울 사람들을 질식하게 만드는데 일조(一助)하고 있다. 정말 '탄산가스 같은 도시'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주말이면 푸르른 동해를 보려는 목마른 서울 사람들로,대관령 고개를 넘어가는 도로나 또 홍천으로 해서 한계령이나 미시령 넘어가는 도로도 그렇게 목이 메이듯 붐비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주말에 서울서 동해까지 갔다 돌아오는 것은 항상 벅찼고,블루 먼데이라고 월요일엔 항상 피로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돼 단숨에 서해 바다를 볼 수 있다고 하여 정말 가슴이 뛰었다. 조금만 운전을 해서 가면 바다를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동해처럼 투명한 녹색의 바다가 아니면 또 어떠냐.서해는 서해대로 또 다른 정취와 철학을 지닌 것이 아니냐.그런 생각으로 나는 서해대교 쪽으로 차를 달려 바다를 보러 가기로 했다. 정말 도로는 잘 건설됐고 주변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서해대교에 들어선 순간 나는 무언가가 기대에 어긋나고 있음을 느꼈다. 서해대교가 금문교처럼 다리를 달리면서도 바다,아니 만(灣)을 볼 수 있는 그런 다리일 것으로 기대했는데 불행하게도 대교는 콘크리트 담벼락을 가지고 있어서 시야가 차단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두 눈앞에 두꺼운 안대를 감아놓은 듯 답답했다. 정말 배고픈 시대의 상상력으로 지어놓은 다리가 아닌가. 다리란 것을 그저 '건너기만 하면 되는' 기능적인 것으로만 생각한다는 자체가 밥도 못먹고 살던 그런 보릿고개 시대의 상상력이다. 그런데 지금 산업화의 근대를 넘어 무엇보다 개성과 다양한 미(美)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탈근대의 시대에 진입한지도 오래인데 어쩌자고 이토록 살벌하고 오직 기능만을 가진 삭막한 다리를 떡 하니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다리 위에서 바다를 보고싶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다리 주변에 주차를 해놓아서 오히려 위험하기까지 했다. 다리를 3분의 2쯤 갔을 때 있는 행담도의 휴게소에 들렀다. 그리고 휴게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옆 모퉁이로 돌아갔다. 모퉁이를 돌아 가면 비록 망망대해는 아니지만 푸르고 아름다운 만(灣)의 물을 보려니 기대했던 나는 그러나 생각지도 않은 장애물에 딱 부딪치고 말았다.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모퉁이에는 철망이 쳐지고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떠억 붙어있었던 것이다. 기껏 거기까지 달려가 바다를 결국 떡 한 시루 만큼만 보고 서울로 돌아오며 나는 내내 생각하고 있었다. 그 휴게소 옆구리 철망에 붙어있던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에 나오는 '관계자'란 누구였을까… 하고 말이다. 어떤 관계자만이 그 언덕을 넘어가 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돼 있는 것일까 하고.거기서 바다는 독점돼야 하는가 하고. 금문교 주변엔 여기저기 전망대를 만들어 놓아 아름다운 베이의 풍경은 물론 그 물에 에워쌓인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를 다(多)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그런 꿈같은 미적 감각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좋은 만의 물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게만 해도 얼마나 좋았을까. 시간 때문에 더 아래로 내려가 서해안 도로를 달려보지는 못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면서 무언가 뚫리지 않은 실망의 찌꺼기가 가슴속에 일렁거렸다. 가깝고 쉽고 싸게 서민들이 아름다움을 즐기며 살 수 있는 것―그것은 아직도 남의 이야기인가 하고. Sophiak@ccs.sog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