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한달 동안 미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 주요기관과 기업을 방문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비즈니스 위크지의 수석경제학자인 마이클 만델과의 면담이었다. 그는 하버드대 출신 경제학박사로 1990년대 초 신경제의 도래를 예언했고 2년 전에는 이의 붕괴를 예언한 책을 내어 제럴드 롭상을 받았다. 이 책은 세계 각국에 소개됐는데 한국에서도 '인터넷 공황'이란 제목으로 출판된 바 있다. 그는 신경제의 주요 특징을 '혁신이 끊임없이,그리고 훨씬 빨리 자주 발생하고,이를 뒷받침하는 벤처캐피털 및 나스닥 중심 새로운 형태의 금융시장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미국과 일본의 차이는 '기술능력의 차이가 아니라,금융시스템의 차이'라고 보았다. 즉 일본은 기술면에서는 미국에 전혀 뒤지지 않지만,신기술 기반 사업을 위험을 무릅쓰고 지원해주는 벤처캐피털 중심의 혁신적 금융체제가 없어 신경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기술은 국경을 넘어 팔고 사기 쉬운 반면,금융시스템 자체는 쉽게 모방이나 이전이 안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런 혁신 친화적 금융시스템을 구축하는데 30년이 걸렸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중소 벤처분야의 침체가 계속되고 있다. 최근 잇따른 벤처 관련 스캔들로 인해 이제 '벤처'라는 말 자체가 부정적 이미지를 연상시키게 됐다. 이 때문에 한 코스닥 기업은 벤처에서 일반기업으로 분류된 것을 반가워 할 정도가 됐다. 미국의 엔론이나 타이코사 사례에서 보듯이 기업 관련 스캔들이나 투명성 문제는 미국을 포함해 어디서나 터질 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일들로 해서 근본적 기류들이 영향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많은 돈이 벤처기업 투자에 묶여 있거나 날아 갔지만,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규모를 약 1천억달러로 보는 미국의 벤처캐피털시장에서 최근 몇 년 사이의 IT불황으로 5백억달러 정도가 날아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분위기는 이를 단순히 '손실'로만 보지 않는다. 바로 그 같은 돈을 기반으로 해 진행된 연구개발이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의 시도가 향후 새로운 혁신의 밑거름이 된다고 보고 있다. 한국의 최근 분위기도 벤처캐피털시장이 죽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으니 다행이다. 만델이 말하는 '신경제에 걸맞은 새로운 형태의 금융시스템을 미국과 가장 비슷하게 갖춘 나라'는 일본 유럽 어디도 아닌 바로 코스닥과 상당한 벤처캐피털시장을 갖춘 한국이다. 일부 기업의 일탈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돈은 신기술 및 모델 개발에 쓰여졌으며,그것이 현재 실패든 성공이든 다음 호황을 준비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30년 걸려 건설한 나스닥과 벤처캐피털시장을 한국은 불과 6년여 만에 건설했으니 허술하기는 하지만,이를 잘 육성하는 것이 한국경제가 앞으로 신경제 환경에서 성장해 나가는데 중요하다. 방미 중 뉴욕의 씨티은행 본사,살로먼 스미스바니 등 금융기업들도 찾아 볼 기회가 있었다. 거기서 내놓은 세계 및 아시아 각국 경제전망 보고서들은 한결같이 '한국은 지난해 주변 아시아국 중 중국을 제외하면 가장 성과가 좋았으며,올해는 더 좋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 특히 금융 및 기업 개혁의 성과가 이제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등 투자 유망국가로 꼽고 있었다. 반면 일본에 대해서는 우려와 함께 온갖 처방을 제시하고 있었다. 세계 여러 나라가 똑같이 신경제 침체의 영향을 받았지만 한국과 미국이 가장 빨리 회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엔론 등 투명성 관련 스캔들을 보면 오히려 한국이 나은 듯 하다. 미국 경제계 인사들도 지난 97년 외환위기 때 한국을 크로니 캐피털리즘이라고 비꼬았지만,이제 자기네들도 그런 셈이 되어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 엔화가치 하락 문제가 복병이긴 하지만,한국경제는 일단 낙관적으로 볼 만한 시스템적 하부구조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정치가 발목을 잡고 있으며,또 하나 교육이 심각한 과제다. klee1012@plaza.snu.ac.kr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