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사람과 사람의 높낮이에 가장 민감한 민족입니다" 사업차 수년간 서울에 거주했던 한 외국인이 한국을 떠나기 앞서 내린 평가였다. 그는 "한국인은 일단 높낮이를 정한 뒤에야 인간관계를 맺기 시작한다"며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에 서면 힘을 쓰려 드는게 한국인의 특성"이라고 좋지 않은 해석도 곁들였다. 그는 권력형 비리가 끊이지 않는 이유를 우리의 민감한 높낮이 문화에서 찾은 것이다. 사실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몇살이냐,어느 학교를 나왔느냐,집이 몇평이냐,월급은 얼마나 받느냐는 질문을 던지며 우선 상대방의 ''힘''부터 가늠해 본다. 취미나 지적 호기심의 교류는 힘의 비교가 끝난 뒤에나 가능해진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가보다는 ''누가'' 부탁했냐가 정책결정 과정에서 보다 중요하게 작용해온 것도 이런 문화의 반영이다. 그 과정에서 ''투명성''은 당연히 생략될 수밖에 없다. 정치인의 전화 한통이 ''묻지마 보증''의 위력을 발휘해온 것도 그 덕분이다. 이런 문화에서 게이트란 이름의 비리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지금 국민들의 눈에는 정현준게이트나 이용호게이트가 그게 그것으로 비치고 있다. 사건의 실체를 알기도 어렵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벤처란 이름을 앞세워 권력층과 온갖 비리사슬을 만든 짜증나는 사건으로 치부하는게 국민들의 일반적 관전평이다. 실제로 최근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각종 게이트는 비리사슬의 대상만 다를 뿐 불법대출과 주가조작이란 점은 똑같다. 정치인이 항상 그 중심에 서있고 국정원 청와대 검찰 금감원 언론 등 영향력 있는 곳은 모두 그 사슬에 고리를 걸고 있는 양상도 별다를게 없다. 그리고 몇사람의 ''희생양''을 내는 것으로 사건이 종결될 가능성도 높은 편이다. 이전의 정경유착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기법이 다소 교묘해지고 비리게임 참여자가 다양해졌다는 것 뿐이다. 물론 비리가 없는 사회는 없다. 선진국들도 정치인들의 뇌물수수 사건이 심심찮게 불거져 나온다. 그렇지만 비리의 실체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우리와는 사정이 다르다. 지금 미국정계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엔론사 파문의 경우 국민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비롯해 누가 얼마의 정치자금을 받았는지,파산여부에 개입했는지 등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사건 종료와 함께 이내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비리가 터져도 이에 승복하는 정치인은 없다. 비리가 드러나면 ''억울하다''는 얘기와 함께 정치보복으로 몰아가는게 우리의 관행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비리척결에 나서겠다"며 굳은 의지를 표명했으나 국민들의 냉소적 반응이 여전한 것도 권력층에 대한 불신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정부나 노태우 전 정부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우리사회는 분명 교도소 담벽 위를 걷고 있다. 권력층에서 만연되고 있는 비리불감증이 사회전반으로 확산되면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사회 전체가 교도소 담장안으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위험에 노출돼 있다. 비리척결의 해답은 하나뿐,사회가 보다 투명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정책결정 과정이 공개되면 높낮이 문화는 자연스레 설자리를 잃게 된다. ''제왕적''권한과 그 주변권력의 상징인 ''가신''그룹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권력집단은 이제 기업들에만 투명성을 요구하지 말고 스스로 투명해지려는 노력을 해야할 때에 이른 것이다. 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