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임오년(壬午年)이다. 임오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는 단연 ''임오군란''을 기억한다. 특히 지금 방송되고 있는 TV사극 ''명성황후''가 그 당시 대원군과 민비 사이의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임오년을 돌이켜 보면 임오군란은 지금부터 2주갑(周甲)전이다. 갑자 을축 병인… 하던 우리 선조들의 간지(干支)계산 방법으로 임오군란 이후 두번째 임오년이 돌아 왔다는 뜻이다. 간지 주기는 60년이니까 2주갑이면 1백20년이다. ''임오군란''은 꼭 1백20년 전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사 속의 임오년은 임오군란 말고도 여러 가지 기억할 수 있다. 우선 1주갑 전(60년 전)의 1942=임오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있었고,4주갑(2백40년)전의 임오(1762=영조 38)년에는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어 가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기는 그보다 한번 더 거슬러 오른 1702=임오년에는 호랑이를 잡느라 포수들을 동원하는 난리법석이 일어난 기록도 보인다. 3백년 전의 임오년이다. 그러나 임오군란이 일어난 1백20년 전은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해였다. 그해 3월 조선왕조는 서양과 처음으로 외교 관계를 맺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조선과 미국 사이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과정을 조금만 들여다 보면 1백2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있었던가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대원군 정권 10년 간 서양의 침투를 기를 쓰고 막던 조선정부가 미국에 문을 열어주게 된 과정은 중국의 권고에서 비롯한다. 당시 서양 나라들은 조선과의 무역을 원했고,그 가운데 미국은 가장 열성으로 통상을 희망했다. 1850년대부터 몇차례 직간접으로 노력한 끝에 미국은 중국의 실력자 이홍장(李鴻章)의 주선으로 1882=임오년의 조미조약이 체결됐던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조선을 서양에 개국하게 돕는 것이 일본과의 다툼에서 유리하리란 판단이 서 있던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은 조선에 대해 정보도 제법 가지고 열심히 교류하려고 하던 것에 비해,조선은 미국을 전혀 몰랐다. 1백20년 전의 조미조약은 미국의 슈펠트 제독과 중국의 북양총독 이홍장 사이에 맺어진 것이지,조선의 외교관은 끼지도 못했다. 이에 앞서 1876년 일본과 국교를 맺고 개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던 조선은 일본에 몇차례 수신사(修信使)를 파견,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눈여겨 보고 있던 중이어서 서양과도 직접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은 지배층 사이에 퍼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중국의 자극으로 중국에 파견된 교섭 대표는 1881년 가을 중국 톈진(天津)에 갔던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이었다. 그래서 미국 대표 슈펠트와 조선의 김윤식,그리고 이홍장이 모두 톈진에서 조선과 미국 사이의 외교 관계를 상의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조선의 김윤식은 미국 대표와 한번도 만나지 않은채 조약안은 준비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무슨 수를 써서든 조선이 중국의 속방(屬邦)임을 조약 제1조에 넣으려 했고,슈펠트는 이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 김윤식을 대표로 한 조선에서는 이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좋다는 판단이었다. 조선대표는 상관없이 조선과 미국 사이의 조약이 준비되고 있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거니와,그 자리에 있던 조선대표가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라 하건 말건'' 오불관언(吾不關焉)이었다니 이 또한 가슴을 칠 일이다. 특히 조미조약 14조가 체결되는 과정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영어를 하는 조선사람이 없었다. 물론 미국인 가운데에도 조선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다리를 놓은 사람들은 중국 통역들이었다. 그로부터 2주갑의 세월이 흘렀다.하지만 우리의 국제적 위상이 지난 1백20년 동안 그리 높아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작년 말에는 중국에서 우리 동포가 사형 당한 사건을 놓고 여러 단계의 외교적 혼란이 있었다. 그런가하면 일본의 괴선박 격침사건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미국은 북한의 배가 어디로 항해하는지 훤히 알고 있었고,그 배가 북한 당국과 교환한 무선통화까지 추적했음이 분명하다. 올해는 나라의 국제적 위상이 보다 높아지는 한 해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parkstar@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