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아프다. 건강할 때는 늘 어린이집에 하루종일 맡겨 놓았다가 데려오곤 했는데 그럴 수도 없다. 나는 아이를 돌보느라 거의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아이는 제 몸이 괴로우니 당연히 어미를 찾게 되고 나는 애잔함 반,괴로움 반으로 아이를 돌볼 수밖에 없다. 애잔함은 어미로서의 본능이고,괴로움은 일을 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개인으로서의 스트레스다. 마음은 바쁜데 손은 아이한테 가 있으니 초조해진다. 아이가 아프건 안 아프건 엄마로서 아이를 돌봐야 하는 건 당연한 의무인데도 그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참으로 버겁다. 부모가 아이로부터 놓여나 제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아이가 안 아파야 한다. 건강하게 아침밥 먹고 현관문을 나서줘야 한다. 나처럼 집이 직장인 사람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아이가 아프면 그저 잠시 하던 일을 중단하고 아이와 함께 있을 수도 있으니. 그러나 직장에 나가야 하는 부모들은 아이가 아프면 어떻게 하나. 직장을 쉴 수는 없으니 누군가 아픈 아이를 맡아줘야 한다. 아이뿐 아니라 집안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야말로 그 집안 전체에 비상사태가 발생한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는 틀림없이 아픈 사람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희생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희생하는 것을 가족으로서의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인다. 아픈 사람을 위해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감내해야 하는 것들은 모두 가족이라는 이름의 사랑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으로 똘똘 뭉친 가족이라 하더라도,가족 중 한사람이 누군가의 평생 헌신을 필요로 하는 병을 앓고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럴 경우에 사랑이라는 말로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을 묶어두기에는 무언가 마뜩찮다. 또 다른 누군가가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진하게 묻어난다. 가족이니까 사랑하는 아픈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아픈 사람과 나는 가족이 아니니 돌볼 의무가 없다는,그렇게 '가족'들만의 일로 떠넘겨진 우리 사회 안의 '아픈 사람' 혹은 '생활이 불편한 사람'들…. 거기에 오랜 병을 앓는 사람들이나 장애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처해 있는 현실까지 돌아보노라면 국가와 사회,그것을 이루는 구성원들인 우리 자신들이 바로 직무유기의 주체임을 깨닫게 된다. 평생동안을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생존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픈 사람 중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히 가족중 누군가의(틀림없이 부모중 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은) 일생을 '담보'로 삼을 수밖에 없다. 형편이 넉넉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그렇지 못하면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생활전선으로 나설 수밖에 없고,아픈 사람은 방치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그리하여 가족은 자신들이 돌보지 못하는 아픈 가족을 맡아줄 누군가를 찾게 되고,바로 그런 이유로 미인가 보호시설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맡겨진 사람들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맡겨진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맡긴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책임회피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내가 맡을 수 없어서,버거워서,심한 경우에는 귀찮아서 내가 책임져야 할 몫을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이고 맡길 곳을 찾게 되는 것이다. 내가 너를 어딘가에 맡기고 네가 나를 또 어딘가에 맡기며,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어디다 맡기고 싶어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방치하고 있다. 이렇듯 서로가 서로를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구조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아픈 아이가 어미인 나를 찾는다.나는 다시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에게 달려간다. 미음을 끓여 먹이고,약을 먹이고,열이 오른 이마에 얼음수건을 갖다댄다. 손발을 주물러주고 노래도 불러준다. 아픈 아이로부터 놓여나는 길은 아이를 힘껏 돌보는 것 밖에는 없다. 아픈 아이를 두고 무슨 일을 하려고 해선 안 된다. 할 수도 없다. 아이로부터 놓여나고 싶을수록 아이를 힘껏 돌보는 수밖에 없듯이,우리 스스로가 진정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면 서로가 서로를 힘껏 보살피는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결국 국가든 사회든 개인이든 각자가 져야할 짐을 누군가에게 맡겨버리고 나면 상황은 계속 악화될 것이고,아무도 악화된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