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우리사회는 각종 '게이트'로 명명돼 있는 권력형 비리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이것은 권력을 가진 세력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으로 무장하지 않고,권력과 돈을 동시에 탐닉한데서 나오는 유감스러운 결과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의 오·남용 없이 국리민복에 헌신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정녕 연목구어일까. 그러나 한편 권력의 올바른 사용문제 못지않게 권리의 올바른 사용문제도 우리사회가 경청해야 할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추곡수매가 동결을 반대하는 농민들로부터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근로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요구들이 제기되고 있고,여의도 국회의사당과 세종로 종합청사앞에는 권리를 주장하는 시위대로 연일 만원이다. 자유 민주주의사회에서 권리의 개념이 강조되고 담론의 화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민주화 이전에는 기본인권조차 경시돼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바람직한 사회는 권리의 개념만으로 지탱되는 사회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개인과 사회집단이 요구하는 권리들은 개별적으로 보았을 때 정당화될 수 있겠으나,사회전체적으로 볼 때 상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측의 경영권과 노조의 생존권이 항상 같이 가는 것은 아니다. 권리가 상충할 경우 권리들 사이에 위계질서가 존재한다면 물론 그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권리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고층 아파트를 건립하려는 건축업자들은 인근 아파트주민들의 일조권이나 조망권을 침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 경우 어떤 권리가 우선할 것인가를 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건축업자들의 사업권도 엄밀하게 보면 생존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권리들을 충족시키는데 있어 경제적 자원이 필요없는 경우도 있지만,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수지 김 살해사건이나,최종길 교수 의문사 등은 명백히 인권을 침해한 경우로서 문제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재정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직근로자의 생존권을 충족시키려면,기업이나 사회전체의 부가 일정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회사가 부도로 쓰러지는 마당에 근로자들의 생존권 주장이 허망한 구호로 들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근로자의 생존권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그 생존권을 지탱할 수 있는 재원이 결여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주5일 근무제도 마찬가지다. 주5일 근무제가 근로자의 복지와 권익을 고양시킬 것은 틀림없지만,결국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기업의 수익능력이 관건이다. 이점에서 '당위는 능력을 함의한다(ought implies can)'는 칸트의 준칙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선진 자본주의국가에서 시행하는 각종 후생복리제도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귤도 환경에 따라 탱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환경조건의 차이를 주목해야 한다는 논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또 권리에 대한 지나친 주장은 한 사회를 천민자본주의,혹은 천민민주주의 사회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권리의 개념에 집착하는 나머지 바람직한 양질의 사회를 위해서는 덕목이나 희생정신 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세모 때 구세군 냄비에 온정을 쏟을 수 있는 것은 이웃사랑과 희생정신 때문이지,권리와 권익 때문은 아니다. 또 자기 집 앞 골목길에 내린 눈을 치울 수 있는 것도 봉사정신이지,권리에 따른 행동은 아니다. 한 사회가 권리의 개념에 매달리게 되면 덕목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며,그 사회는 삭막한 사회가 될지언정,살맛나는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권리의 보유와 권리의 행사는 같은 것이 아니란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그 빵을 먹는다는 사실은 다른 것이다.시속 60㎞로 달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해도 앞의 차가 서행하고 있다면,뒤차도 서행 해야 한다.이와 마찬가지로 개인과 집단들이 시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나,그 권리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는 분별력이 요구된다. '권리 만능'의 사회보다 '권리 자제'의 사회가 될 때 비로소 삶의 질이 높아지는 사회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