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그 헌법인 기본법 50주년을 맞이하면서 과시한 국가체제에 대한 자부심에 은근히 시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통일이라는 역사적 대업을 이룩했고,2차대전의 전화를 딛고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민주적 법치국가의 기틀을 다져왔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직도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으려는 문화적 자폐증을 탈피하지 못하는 일본과 비교할 때 독일은 많은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을 만하다. 과거의 잘못을 진심으로 참회하는 태도를 보여 주변국들의 이해를 얻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사회적 법치주의,그리고 연방주의라는 소위 기본법 체제를 확고히 정착시킴으로써 국제사회의 모범이 돼 왔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헬무트 콜이란 인물이다. 그는 1982년 10월 슈미트 내각에 대한 불신임을 계기로 중도우파 하이퍼텍스트의 총리로 취임한 이래 98년 9월27일 실시된 총선에서 패배하기까지 17년 간 독일총리를 역임했다. 90년 10월 독일통일을 이룩해 '통일총리'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됐을 뿐만 아니라,'유럽통합의 완성'이라는 과제를 하이퍼텍스트적 비전을 가지고 추진해 나간 인물로도 기억된다. 그런 콜 전 총리가 2백여만마르크의 불법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기민당 비자금 스캔들의 주역으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콜 전 총리는 99년11월 불거진 기민당 비자금 스캔들로 검찰 조사를 받다 지난 4월 검찰이 30만마르크의 벌금을 부과하는 선에서 수사를 종결함에 따라 사법처리의 위협은 벗어났지만,기민당 명예당수직에서 사퇴하고 통일 10주년 기념식에 참석 못하는 등 수모를 겪었다. 콜의 스캔들은 자신들의 국가시스템에 자부심을 느껴온 독일인들에게 일대 충격이었다. 일각에서 '국가시스템에 무언가 이상이 있다'는 경종이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가령 독일 비판적 지성의 중심인물인 정치학자 클라우스 오페 같은 사람은 국가제도가 이른바 정치적 계급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고 지적했고,슈파이어 대학의 공법학자인 폰 아르님은 '체제-권력의 음모'라는 책을 통해 정치자금조달,선거법,연방주의 및 직접민주주의 등을 통해 정치계급이 자신들을 규율할 룰 자체를 좌우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구조를 손상시키고 있음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정치계급들이 편파적 공직인사와 정치부패 문제에 대해 효과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자신을 규율할 정치규범의 형성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사실 콜은 제3세계 후진국에서나 있을 17년 동안이나 집권하다 정치자금 스캔들에 빠지고 말았다. 17년이라면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장군의 집권기간과 엇비슷한 기간이다. 장기집권은 민주주의 선진국에서조차 부패를 낳는다는 말을 입증해 주는 듯 하다. 우리나라에도 정치계급이 있지 않은가. 정치자금규제의 역사를 보면 여야를 막론하고 기성 정치권에 불리한 투명성,통제의 강화를 위한 법개정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또 법개정 과정에서 집권여당의 이해관계가 주로 반영됐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반면 정치자금 조달을 원활화하기 위한 개정은 여야공조를 통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정치자금 규제에 있어 여야공조는 우리나라에도 정치계급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확연한 현상이다. 이들 정치계급의 내부공조체제야말로 그렇게 많은 사회적 요구가 있었는데도 어째서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통제를 강화하는 실효적인 제도개선안이 나오지 않는지,왜 시도 때도 없이 말만 무성하고 진정한 정치개혁이 단행되지 않는지를 설명해주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정치계급이 자신들을 규율할 게임의 법칙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일을 하겠는가. 혼돈에 빠진 우리나라의 사정도 실은 정치라는 부패의 시장이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정치시스템보다 더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정치계급의 공조와 정경유착의 구조를 깨지 못한다면,정치개혁은 물론 경제발전도,번영의 21세기도 있을 수 없다. 우리도 독일처럼,아니 독일보다 더 심각하게,'국가에 무언가 이상이 있다'는 외침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 joonh2001@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