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kim@e-corporation.co.kr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꼭 한 달을 중환자실 신세를 지고 마치 더 이상 가족들의 성가심을 원치 않으신 것처럼 꽃잎처럼 가셨다. 입관을 지켜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43세가 될 때까지 죽음의 광경을 그 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둘러보니 40명을 훨씬 넘는 사람이 모였는데 젊은이는 하나도 없다. 마흔은 넘어야 이런 자리에 초대되는 것 같았다. 이전에 이러한 입관의 예를 보았다면 삶에 대한 태도가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음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영원히 살 것 같았기 때문에 총력을 다해 살아오지 않았을까. 인간의 수명을 팔십이라 하면 20년씩 네 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20세까지는 교육과 성장으로,40세까지는 일로,60세까지는 지혜와 명철로,80세까지는 죽음과 신성에 가까워지려는 모습으로 살지 않을까. 40세까지 한번도 이러한 입관의 자리에 초대받지 못했다. 우리는 20대와 30대 젊은이들에게는 죽음을 감추는 것 같다. 그들은 마치 죽음이 없는 것처럼,인생이 영원한 것처럼 달려야 하기 때문에 죽음의 자리에는 일부러 초대하지 않는 것 같다. 그 시기에는 도리어 영원히 살 것 같은 욕심과 오만,정열과 에너지가 차올라야 하는 시기이기에 죽음을 보여주지 않는 것 같다. 20,30대의 도전과 40,50대의 지혜가 이루어내는 생산이 경제의 기반이 아닌가. 그들이 20대 미만과 60대 이상을 떠받치고 있는 생산인구가 아닌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믹스되어야 한다''벤처가 대기업과 상생하는 구조를 가져야 한다'…. 죽음을 모르고 달려왔던 나의 20,30대와 인생의 높낮이를 목격한 40대 초입에서 벤처사업을 되돌아본다. 벤처에 기업의 몰락과 파산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된다. 벤처는 영원히 살면서 도약하고 비상하는 면을 맡고 있는지도 모른다. 20,30대를 보내는 동안 왜 한번도 입관의 자리에 초대받지 못했는지 알 것 같다. 그때는 영원히 살 것처럼 달리기만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