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이라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측면이 있다. 그 개념을 최초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아마도 주사위를 굴리던 노름꾼들이었을 것이란 얘기가 있는데,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확률에 밝다고 따는 것은 아니다. 내 주변에는 경마에 나오는 말(馬)들의 과거 실적을 기록한 치부책이 영어사전 만큼이나 두툼한 사람이 있는데,'성적'은 한마디로 별로다. 산술적인 확률과 세상사의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측면이 있는 것 같다. 흰 돌과 검은 돌이 반반인 바둑통에서 검은 돌을 짚어낼 확률은 50%,두번 연달아 검은 돌을 짚을 확률은 0.5?0.5,곧 25%란 게 산술적인 계산이다. 그러나 지나온 세상 일을 되돌아보면 이런 계산은 설득력이 없다.집권당 총재인 대통령이 탈당할 확률이 몇%나 될지는 누구도 계산해내기 어렵겠지만,그것이 연달아 되풀이될 확률이 첫번째 확률을 제곱한 숫자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옳다. 좋은 일이건 그렇지 못한 일이건 선례가 있으면 재연될 확률은 오히려 커지는 게 세상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임기중 탈당하지 않았다면 김영삼 전 대통령의 탈당도 없었을지 모른다는 것은 나만의 잘못된 판단이 아니라고 본다. 한번 일어난 일은 두번 있게 마련이란 말이 꼭 남녀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나는 두 전임 대통령의 탈당이 무책임의 극치였는지,아니면 공정한 선거관리를 위한 '결단'이었는지 따져볼 생각은 없다. 그것은 두 대통령 집권말기의 레임덕 현상을 말해주는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당 총재직 사퇴는 두 전임 대통령의 탈당과 형식요건상 분명히 다르지만,임기말 현상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통하는 점이 있다. 교원정년,검찰총장 국회출석 문제 등을 둘러싼 여야간 줄다리기가 어떤 식으로 타결되고 이른바 무슨 무슨 게이트라는 것들에 대한 특검제나 국정조사가 어떻게 귀결될지 더 두고봐야 알 일이지만,최악의 경우 97년과 같은 통치력 부재현상이 빚어질 우려도 없다고만 하기 어렵다.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빚어지기 때문에 레임덕이란 말이 생겼겠지만 우리나라의 그것은 유별나다고 할 수 있다.임기중 대통령의 연이은 탈당이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라는 점만으로도 그렇게 풀이할 수 있다. 왜 그럴까.원인은 문화적인 토양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고,또 부통령도 없는 대통령단임제 등 제도적인데 기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신익희 조병옥 후보의 연이은 별세로 현실적으로 무의미했던 대통령선거를 두번이나 치렀던 경험에도 불구하고 왜 미국식 정부통령 동일티켓제를 채택하지 않았는지,지역갈등이 심했던 지난 몇차례의 대선 때 어느 한쪽 후보에게 '유고'라도 발생했다면 과연 어떤 사태가 발생했을지,이래저래 생각해보면 원맨플레이를 골격으로 하고 있는 현행 제도의 문제점은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보다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할 것은 레임덕 현상이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다. 만약 97년 정치상황이 달랐더라도 IMF사태가 불가피했을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역사에는 가정이 필요치 않다고 하지만,만약 김영삼 대통령의 무력증이 없었다면 IMF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을 수 있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96년 말 노동법 파동,김현철 청문회 등 우여곡절을 거치며 만연했던 무력증,그것이 결국 기아 등 대형 부실기업들을 부도처리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돈을 대줘 살리지도 않는 '직무유기' 양상을 빚어냈었다. 그래서 한국경제가 좋지못할 뿐 아니라 한국정부의 위기관리능력도 수준 이하라는 인식을 대외적으로 확산시켜 IMF를 불렀다고 본다. 지금의 경제상황은 97년의 그것과 물론 다르다. 외환보유고만도 1천억달러를 웃도는 만큼 제2의 IMF사태는 없을 것이란 얘기는 그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도 경제가 걱정스럽기만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끝없는 경기침체,아직도 불안한 구석이 한둘이 아닌 금융시장등 경제 자체도 물론 문제다. 여기에 여소야대의 국회,때이른 대선분위기 등이 자칫 상승작용을 한다면 테크노크라트 출신 경제장관들이 철저히 무력해지면서 경제가 97년의 전철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없다고 하기 어렵다. /본사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