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보증보험 박해춘 사장(53)이 지난 23일 임시주총에서 재선임되면서 또 하나의 기록을 갖게 됐다. '공기업 최고경영자는 단임'이라는 정부의 인사원칙에 예외가 됐다는 것. 그는 지난 98년 11월 정부가 대주주인 통합보증보험사 최고경영자를 맡았을 때 화제를 뿌렸다. 관료나 군 장성 출신이 차지해 왔던 이 자리를 민간기업 상무가 맡게 됐기 때문이다. 박 사장이 서울보증보험 대표가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IMF 사태 직후 부실금융사로 낙인찍힌 대한.한국보증보험을 합친 서울보증은 그야말로 난파 직전의 위기상황에 처해 있었다. 서울보증보험의 회사채 지급보증 규모만 총 72조원에 달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마저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서울보증보험이 떠맡아야 할 대지급금이 어느 정도 될지 파악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때 박 사장을 발탁한 사람은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던 이헌재씨였다. 10여명이 사장 물망에 올랐으나 당시 이 위원장은 박 사장을 적임자로 꼽았다. 금융 보험과 관련된 전문지식과 강력한 업무 추진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중책을 맡게 된 박 사장에게 23년간 잔뼈가 굵었던 회사(삼성화재)를 떠나야 하는 아쉬움도 없진 않았다. 그래도 정부의 선택을 물리칠 수 없었다. 잘 만하면 남이 경험하지 못할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 박 사장은 회고한다. 박 사장은 '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서울보증 첫 출근과 동시에 박 사장의 예상은 빗나갔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신용을 창출하는 보증보험사가 대외공신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공적자금 외엔 기댈 수 있는게 없었습니다" 성격이 다소 급한 그로서는 첫 출근날 퇴근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발짝이라도 물러설 자리도 없었다. 불교 신자인 박 사장은 부처님의 혜안을 얻고자 새벽같이 일어나 참선을 했다. 이윽고 그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답을 얻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풀 순 없다.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실천하자고 마음을 잡았다. 그는 먼저 밀물처럼 돌아오는 대지급 요구에 응할 수 있는 재원 마련에 나섰다. 당장 내줘야 할 돈만 무려 4조원에 달했다. 유동성을 확보해야 보증보험사의 근간을 지킬 수 있었다. 먼저 정부에 손을 내밀었다. 반드시 정상화할 테니 믿고 도와달라고 하소연했다. 대한.한국보증보험의 주주였던 생.손보사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이렇게 급한 불을 끄기 시작한 박 사장은 위기 원인을 없애는 노력을 함께 기울였다. 회사채 지급보증을 전격 중단했다. 아무리 보증회사라고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위험에 대해 보증을 서는 것은 명백한 경영 오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 사장 취임 당시 71조원에 달하던 회사채 보증 잔액은 3년이 지난 이 달 현재 1조원 수준으로 줄었다. 보증심사 절차도 강화하고 과학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영업일선과 적지 않은 갈등을 겪기도 했다. "보증대상 회사의 미래를 몇가지 잣대로 정확히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욱이 공공적 성격이 강한 보증사로서 때론 전체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합리적인 절차를 통한다고 해도 보증 여부를 결정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 결과 서울보증 출범 직후 1백43.1%에 달했던 손해율이 올들어 32.2%로 뚝 떨어졌다. 삼성에서 근무하면서 그가 얻은 경영 수완도 회사체질을 바꾸는데 큰 도움이 됐다. 먼저 고강도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1천8백여명의 임직원을 8백명 정도로 줄였고 임금도 30%가량 깎았다. 점포도 40개 이상 줄였다. 이와 함께 그는 채권 회수에 주력했다. "국민의 혈세를 받는 기업으로서 1원의 채권이라도 챙기는 노력을 하는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박 사장은 앞으로도 서울보증보험이 대지급한 채권을 회수하는 데는 예외가 없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친정인 삼성그룹과 담판을 벌여 삼성차에 대한 총 지급보증액 2조1천1백39억원중 9천3백82억원을 받아낸 것도 이런 원칙에 따른 것이다. 박 사장은 추가로 5천6백억원을 돌려받기 위해 삼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채권회수뿐만 아니라 박 사장은 당연히 줘야할 보험금을 줄이는 노력도 기울였다. 언뜻 보기엔 보증사 사장으로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박 사장은 대우채 대지급금과 관련, 투신권에 어려움을 분담하자는 의외의 제의를 서슴지 않았다. 결국 밀고 밀리는 지루한 협상 끝에 이연 변제하는 방식으로 서울보증의 부담을 덜어내는데 성공했다. 박 사장이 이처럼 어려운 일을 해결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일 자체를 즐기는 그만의 성격 때문이지도 모른다. 어려운 일일수록 더 정성이 들어가고 그 결과도 흥미로워진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한번 시작한 일은 뚝심있게 밀고 나가는 추진력까지 갖추고 있다. 한번 시작하면 확실한 결과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면 예상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박 사장은 서울보증보험이 정상화되면 독점의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담보력을 키우는 것 못지 않게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고객지향적인 보증보험사로 탈바꿈하는게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박 사장은 벌써 3년 뒤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익원 기자 iklee@hankyung.com ----------------------------------------------------------------- [ 약력 ] 48년 충남 금산 출생 68년 대전고 졸업 76년 연세대 수학과 졸업 77년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입사 93년 삼성화재 이사 98년 삼성화재 상무 98년 11월 서울보증보험 대표이사 사장 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