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외국계 투자회사들이 국내 기업들에 가하고 있는 횡포는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추진한 급격한 금융구조조정의 후유증이다. 정부는 금융회사에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무조건 8% 이상 유지하라고 강요, 법정관리나 화의중인 기업들의 부실채권을 외국계 투자회사에 무차별적으로 헐값에 팔도록 유도한 '원죄'를 안고 있다. 그러나 단기간 내에 수익을 올리고 투자원금도 되찾아야 하는 외국계 투자회사와 길게는 10년 가량 소요되는 부실기업의 회생 작업은 본질적으로 '상극'이다. 이에 따라 이들에 피해를 입는 국내 기업들이 속출할 것으로 전망된다. ◇ '본드메일' 수법 등장 =신호스틸 관계자는 18일 "이번에 경매 신청을 한 캠스는 신호스틸이 법정관리에서 탈피하기 직전에도 '억지'를 부렸다"고 주장했다. 캠스는 지난 7월 신호스틸이 법정관리 졸업을 위해 필요한 법정관리 계획안 변경에도 반대했다는 것. 장부가액 기준으로 3백74억원이던 이 회사의 담보채권을 자산관리공사로부터 1백46억원에 할인해 샀다는 정보를 입수한 신호스틸은 캠스에 1백74억원에 되사주겠다고 제안을 했지만 캠스는 2백억원을 요구했다. 물론 협상은 결렬됐다. 이에 따라 서울지법 파산부는 캠스의 채권만은 변경 전 계획안(95년도)대로 변제하도록 하는 조건(권리보호조항)을 적용, 신호스틸의 법정관리 졸업을 인가했다. 한 M&A부티크 사장은 "외국계 투자회사들이 특정 기업의 채권을 매집한 뒤 이를 주식으로 바꿔 경영권을 빼앗거나 파산신청을 하겠다고 위협해 이 채권을 해당 기업에 비싼 값으로 되사게 만드는 소위 '본드 메일(bond mail)'을 하고 있다는 풍문이 있었다"며 "신호스틸은 그 전형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그는 "대부분의 본드메일은 당사자간 이면약정 등을 통해 은밀히 거래되고 있어 노출되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회계법인의 실사 결과 존속가치가 청산가치보다 높게 나와 법정관리 인가가 유력한 고려산업개발은 아직도 인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하나은행과 한미은행으로부터 채권을 사들인 리먼 브러더스와 서버러스가 일정액에 대한 탕감과 거치기간(원금상환 없이 이자만 주는 기간)안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산 관계자는 "울며 겨자먹기로 회사정리법이 허용하는 선에서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방향으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 3년내 회수가 목표 =외국계 투자회사들이 최근 국내 기업들과 마찰을 빚는 것은 투기자본이라는 특성상 부실채권 매입에 들어간 투자금을 단기간 내에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원금과 수익의 목표 회수기간은 늦어도 3년이며 수익률은 최저 연 평균 20% 가량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 법정관리 기업 관계자는 "이들 투자회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매년 연봉 재계약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올해의 실적이 곧 내년도 연봉과 직결되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채권 회수에 나서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 당하는 기업만 서럽다 =이처럼 외국계 투자회사의 '횡포'에 국내 기업들이 멍들고 있지만 마땅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신호스틸 관계자는 "이들은 전세계를 대상으로 부실채권에 투자해 고수익을 내는 금융전문가"라며 "국내에서도 김&장 등 대형 로펌을 동원해 법률 검토 등을 마친 뒤 행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금융감독원 등 관계 당국은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며 "현 단계에선 주기적인 공론화를 통해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한두 달 내에 50∼1백%의 폭리를 취하는 행위 등은 현행 민법상 계약 자체를 무효화할수 있어 법적인 해결이 가능할수 있다"고 말했다. 이상열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