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鶴容 < 세종대 석좌교수 / 경제학 >


올해 초부터 하강국면에 접어든 미국경제의 여파는 동아시아국에도 과거 수십년 동안 볼 수 없었던 경기침체를 가져오고 있다.

특히 9·11 뉴욕 테러사태 이후 경기침체의 징후는 가속화될 전망이어서 새로운 사고의 틀이 요구되고 있다.

우리 나라는 대만 홍콩 싱가포르에 비해 자동차 조선 철강 등 소위 굴뚝산업의 비중이 높아 경기침체의 정도가 덜하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경제성장의 틀에 속하고 있어 과감한 정책적 변화가 요청된다.

동아시아의 경제성장은 대외지향적 성장패러다임에 의존해 왔고 앞으로도 그런 기본적인 틀은 변할 것 같지 않다.

특히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알려진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의 경제성장은 무역확대에 민감하게 연계돼 있는 것이 그들의 구조적 특성이다.

그런데 1997년 불어닥친 아시아의 외환위기 이후 지역내 국가들은 외환시장의 안정화에 주력한 나머지 기본적인 성장의 엔진을 무력화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그 중에서도 한국은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거치고 있는데,저성장을 감수하면서도 일본의 전철을 밟아 외환보유고를 꾸준히 증가시켜 왔다.

그 결과 동아시아국들의 외환보유고는 계속 늘어 세계 최고의 외환보유국이 됐다.

일본 중국이 1,2위를 차지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홍콩이 지난 3월말 1천1백47억달러로 3위,대만이 1천1백6억달러로 4위,한국이 6월말 9백47억달러로 5위,싱가포르는 7백68억달러로 7위를 차지하고 있다.

얼마전 우리 외환보유고는 1천억달러를 넘어섰다.

반면 독일 6위,미국 8위,프랑스는 9위를 점하고 있다.

이들 북미나 EU국가들과 동아시아국가들의 무역규모를 생각할 때 후자들의 외환보유고는 지나친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외환보유고의 증가는 대외채무에 대한 지불능력을 증가시킨다.

또 외환시장에서의 투기를 방지하는 것은 물론 외환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등 여러 가지 장점이 따른다.

그러나 외환보유고의 증가는 상당한 기회비용을 수반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외환보유고의 증가는 경상계정의 흑자에 의해 가능해진다.

경상계정의 흑자는 필연적으로 재정부문의 흑자나 민간부문의 초과저축을 수반한다.

여기서 말하는 초과저축이란 투자를 초과하는 저축을 의미한다.

민간부문의 투자가 더 이루어질 수 있는데도 투자가 부진해 초과저축이 발생하고,그것이 경상계정의 흑자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외환보유고의 증가는 또 자본계정의 흑자에 의해서도 가능하게 된다.

자본계정에서의 흑자는 우리 기업들의 해외투자가 부진해 발생할 수도 있다.

우리 기업들의 국내외 투자부진은 성장잠재력을 둔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동아시아의 이머징마켓이라고 할 수 있는 베트남이나 중국 등에 과감한 투자를 해야만 우리 부품산업의 수출과 완제품의 우회수출이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기업들의 국내외 투자가 위축되고 있으며 그 결과가 외환보유고의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대기업의 총액투자한도를 내세워 투자를 가로막고 있다.

대기업들의 투자를 제한하여 시장지배력을 제한하는 것이 그들을 규제하는 유일한 방법이란 말인가.

투자를 촉진하고 경쟁을 유도하는 방법은 없는가.

기업의 규모가 커지는 것은 현대경제 특징의 하나인데 어떻게 그런 추세를 막으려 하는가.

외환위기를 예방하는데는 적정 외환보유고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동아시아 중앙은행들의 긴밀한 협력을 이끌어 내는 것도 중요하다.

동아시아의 통화기금(AMF)을 창설하자는 데는 이견이 많지만,중앙은행들이 협의체를 만들어 회원국들의 외환위기를 공동으로 대처하자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그래야 기회비용이 최소화된다.

각국이 개별적으로 외환위기를 염려하다보니 극심한 경기침체를 경험하면서도 과도한 외환보유고를 유지해 홍콩이나 대만,그리고 한국 같은 나라들이 독일이나 프랑스보다도 더 많은 외환보유고를 갖고 있는 희한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hrhee@thrune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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