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수도가 베를린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독일의 수도는 분명 베를린이다. 그 베를린이 선거를 치렀다. 선거는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고백한 바 있던 보베라이트 시장이 이끄는 집권 사민당(SPD)의 승리로 끝났다. 사민당의 승리는 예상된 것이었지만,기민당이 몰락하고 구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인 민사당(PDS)을 이끌고 있는 귀지가 구 동베를린 지역에서 과반수에 육박하는 지지를 얻어 약진한 것은 의외의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들 주요 정당들이 연정 구성을 둘러싸고 벌이는 협상이다. 다수당이 연정 파트너가 될 정당들과의 협상을 통해 이념과 정책의 조율 가능성을 점검하고 정부를 구성한다는 의원내각제의 특징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대통령제 하에서도 걸핏하면 합당이니,정책연합이니 정략적 이합집산을 거듭해온 우리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르다. 역시 연정협상은 대테러전쟁에서 미국과의 연대를 반대하는 민사당이 배제되고 사민당 녹색당 자민당 간의 소위 '신호등 연정(Ampel Koalition)'으로 불리는 '적-녹-황 연정'쪽으로 기울고 있다. 한편 태평양의 가장자리 한쪽에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선거 참패와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로 집권여당이 대혼란에 빠진 것이다. 반면 한나라당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물론 이들도 여당의 개혁노력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예의주시하고는 있지만,내년 대선을 앞두고 지리멸렬의 조짐을 보이는데 대해 내심 흐뭇하게 여기는 표정이 역력하다. 때마침 한 여론조사 결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차기 대선에서 여권의 어떤 후보와 상대해도 모두 이기는 것으로 나타났으니 희색이 만면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별 실수만 안하면 이기는 싸움이려니 하고 표정을 관리하고 있는 야당의 행태에서 우리는 다시금 우리 정치의 현주소를 본다. 자신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이념과 정책을 내세우고 유권자들을 설득해 승리하는 '승리자의 정치'가 아니라,상대방이 비리와 실정을 저질러 파탄지경에 빠진 탓에 어부지리를 얻어 승리를 거머쥐는 '패자의 정치학(loser's politics)'이다. 물론 재보선에서 압승한 한나라당은 자신들의 승리를 평가절하한다고 골을 낼 것이다. 그러나 여당의 패배가 곧 자신들의 성공을 뜻한다고 강변한다면,민심을 모르기는 여야가 매한가지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패자의 정치는 선거에서의 정치행태를 파행화한다. 자신의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설득해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상대방을 헐뜯고 깎아내림으로써 이를 취하려는 네거티브 캠페인은 결국 선거판을 진흙탕으로 만들어 누가 더 나쁘고,누가 덜 나쁜지 분간이 어렵게 만든다. 결국 '똑똑한 민심'은 미운 놈 골탕먹이는 쪽으로 헛헛한 해학을 걸게 마련이고,'어리석은 민심'은 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생각,그리고 정책을 택하는 꼴이 되고 만다.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사람이 무엇을 얼마나 잘 할지 가늠도 하지 못하면서 표를 던지는 것이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자 뇌관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거는 이처럼 미운 놈 탓에 엉뚱한 사람에게 어부지리를 주고 마는 역설의 함정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선거를 이렇게 만드는 것은 결국 정치인들의 책임이고 그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드러내는 정치와 정책의 빈곤 탓이다. 그것은 부정선거 못지 않게 민주주의를 망친다. 이번 선거철에는 좀 그럴듯한 정책대결을 보고 싶다. 차기 대선에서 야당의 승리를 전망한 그 여론조사에서도 '정계개편이나 신당 창당 등을 통해 현재와 다른 정치구도로 치러야 한다'고 기대하는 의견이 과반수라고 한다. 당의 민주적 혁신을 내세우고도 우왕좌왕하는 여당이나,유유자적 뒷짐지고 먼산을 바라보듯 하는 야당이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다. 이제 과연 누구에게 정부를 맡길 것인지,국민들이 제대로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정치인들이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이 실천할 정책과 프로그램을 보여서 국민의 판단을 받겠다는 정도(正道)의 정치로 돌아오길 바란다. joonh2001@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