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저XG가 경이적인 장기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지난 98년 10월 출시 이후 만 3년이 지났는데도 갈수록 '진가'를 더해가는 명품의 반열에 올라섰다. 소비자의 변덕이 심한 국내 자동차시장에서 극히 이례적으로 4년 내리 판매실적이 늘어나고 있다. 98년 6천4백58대, 99년 3만4천2백91대, 2000년 4만3천8백69대를 판매한데 이어 올해는 5만대 이상이 팔려 나갈 전망이다. 그랜저XG가 새삼 주목받는 것은 북미대륙 한국차 돌풍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작년 9월부터 미국에 수출되기 시작한 그랜저XG는 진출 첫해 월평균 4백대 정도 판매량을 나타내다가 올해는 1천6백66대 수준으로 껑충 뛰었다. 테러 여파가 본격화된 지난 10월에는 고급차시장에 엄청난 '한파'가 닥칠 것이라는 일반적인 전망을 뒤엎고 전달보다 무려 1백12.6% 증가한 2천8백60대나 팔렸다. 난공불락을 깼다 배기량 3천cc와 가격 2만5천달러 안팎의 미국내 고급 중형 세단 시장은 그동안 한국차 업계에 '난공불락'으로 여겨졌었다. 승용차시장에서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이 시장은 도요타 캠리와 아발론, 혼다 어코드, 포드 토러스, 닛산 맥시마, 아우디(A4) 등 일본 독일 미국 3국의 명차들이 경합을 벌여 왔다. 이 시장의 고객 타깃은 미국에서 고객 로열티가 강한 중산층 가정이나 연봉 7만~8만달러 이상 전문직 종사자들. 이들은 웬만해선 구매성향을 바꾸지 않기 때문에 한국 같은 후발주자들은 세계 최고의 품질을 갖추지 않고는 함부로 경쟁에 뛰어들 엄두를 못내 왔다. 그동안 미국에서 국산차의 간판역할을 해온 현대의 EF쏘나타 엘란트라 액센트 등은 차시장의 중심부를 정면공략할 만한 차종들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그랜저XG의 '성공'은 국산 자동차가 세계차 시장의 진검승부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자동차 마케팅 컨설팅사인 앨리슨 피셔의 더그 스콧 사장은 "그랜저XG의 성능과 참신한 브랜드 이미지는 일본과 유럽업체 매장만 기웃거리던 미국(고급) 소비자들을 한국차 매장으로 끌어들이고 있다"고 평했다. 무엇으로 승부하나 물론 아직도 경쟁브랜드인 캠리 어코드 토러스 고급형과의 격돌에서 힘이 부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경쟁 차종들에 비해 2천~3천달러 정도 저렴하면서 성능은 비슷하게 따라잡았다는 측면에서 시간이 갈수록 격차를 좁힐 수 있을 것이라고 현대측은 자신하고 있다. 현대는 그랜저XG가 국내에 나온지 2년이나 지난뒤 미국에 내보냈다. 오랜 기간 나름대로 치밀한 전략을 짰다는 얘기다. 현대차는 우선 경쟁 차종들의 장단점과 현지 소비성향을 꼼꼼하게 분석했다. 포드 토러스나 도요타 캠리처럼 미국에서 연간 30만대 이상씩 팔려나가는 차들의 강점은 과감하게 채용했다. 진입 초기에 물어야할 '비용'도 계산했다. 이래서 나온 결론이 '품질은 고급 세단에 맞추되 가격은 약간 낮게' 책정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다 고급스런 외관과 디자인을 강조하고 10년 무상수리 서비스로 뒤를 받쳤다. 처음에 한국차의 '고급화'를 의심스런 눈길로 쳐다보던 소비자들도 차츰 '입소문'이 나면서 자세가 달라졌다. 지난 3월 그랜저XG를 2만5천달러에 구입한 리치먼드(버지니아주)의 변호사 마이클 웰스씨(44)는 "내가 지금껏 운전해본 중형 세단 가운데 최고"라며 "주위 동료들에게도 적극 추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 역시 그랜저XG가 닛산 인피니티나 혼다 아큐라와 맞먹는 고급 자재로 만들어졌고 차내 소음제거도 도요타 렉서스에 버금갈 만큼 깔끔하게 마무리됐다고 호평했다. 브랜드 '이미지 업'이 관건 그랜저XG는 '한국 자동차는 싸구려'라는 미국인들의 인식을 바꾸는데 일단 성공했다. 하지만 '한국차를 사는 것은 일본 또는 독일산 차를 살 여유가 없기 때문'(뉴욕타임스)이라는 인식이 여전하다. 최근 세계적인 자동차조사 전문기관인 'JD POWER'가 그랜저XG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구매 동기를 조사한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소비자들의 43%는 구매 이유로 '가격에 비해 뛰어난 성능'이라고 응답, 아직도 품질보다는 가격 메리트에 이끌린다는 반응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이에 따라 지속적인 품질 향상과 체계적인 마케팅을 통해 브랜드 가치를 더 올려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주우진 서울대 교수는 "그랜저XG가 맥시마처럼 15년이상 장수모델로 자리잡으려면 브랜드 가치를 올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그래야 품질에 걸맞은 좋은 가격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