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치를 생각할 때마다 자조적이 된다. 왜 그럴까. 신지식인 정보화 등 탈근대 시대에 살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민주주의를 말할 때 목격되는 행태는 전근대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젊은이들 사이에 흔히 회자되는 '왕자병' '공주병'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보화시대에도 횡행하고 있는'끼리끼리'의 연고주의,가신그룹,제왕적 통치 등은 바로 '탈근대'와 '전근대'의 당혹스러운 공존을 보여준다. 제왕적 통치행위란 무엇인가. 대통령 앞에서 쓴소리를 할 수 없다면,또 대통령이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한다면,이것이 바로 제왕적 통치행태다. 얼마 전 김대중 대통령의 경남도민 초청 오찬간담회에서 발언을 하려던 한 농민대표가 경호원들의 제지로 할 말을 하지 못한 채 끌려나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통령이 각계 대표를 초청해 점심을 함께 하는 간담회라면 국민의 소리를 직접 들으며 민심을 파악하는 자리인데,경호원들이 왜 그랬을까. 대통령의 '외적' 경호 못지않게 '심적' 경호까지 하려고 했기 때문일까. 더욱이 DJ는 JP와의 공조를 포기하면서 국민을 직접 상대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공언했는데,그러한 공언은 허언이 된 셈이다. 요즈음 10·25 재보선 참패와 관련해 민주당내에서는 대통령의 귀를 가리는 세력이 있다며 이에 대한 척결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공개석상에서도 대통령의 귀를 가리는 일이 태연하게 벌어진다면,공개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이때 만일 DJ가 그 경호원들을 일갈하고 농민대표에게 언로를 열어 주었더라면,그의 포퓰리즘은 빛났을 터인데….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우리 정치의 전근대성은 책임정치의 실종에서 두드러진다. 민의의 향방에 따라 권력 당사자들이 책임을 지는 정치가 근대적인 민주정치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DJP공조가 만천하에 파기돼 DJ정부는 명실공히 소수정부가 됐는데,변한 것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변한 것이라면 자민련에서 파견됐던 장관들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민주당 소속 인사들이 대신 차지한 것뿐이다. 더구나 DJP공조 파기의 원인이 됐던 장관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며 대통령 특보에 임명되고 자민련 출신의 국무총리는 그대로 유임됐다. 하지만 DJ정부가 소수정부가 됐다면 더욱 더 근신해야 하며 소수당 정부에 걸맞은 정치행태가 있어야 하겠는데,DJ정부는 DJP공조 상황과 다름없이 다수당 정부의 권한을 만끽하고 있다. 또 이번 재보선 참패로 민주당은 확실한 소수당이 됐다. 그랬으면 당연히 선거 패배를 인정하고 다수의석이 된 한나라당에 의정권을 넘겨주고 '분점정부(divided government)'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은 전당대회 시기를 두고 입씨름을 하는 등 한가한 소리를 하며 여전히 다수당인양 행세하고 있다. 더욱 우리를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한 정당이 참패를 했으면 당연히 당총재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든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오히려 그 밑의 최고위원들이 물러나겠다고 사표를 내고 난리다. 권한은 위로부터 내려오고 책임은 아래로부터 지게 되는 이 진풍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또 재보선 이후 10일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책임 소재조차 가리지 못한채 '음모론'과 '역음모론' 논쟁만 일삼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이것은 결코 책임정치의 모습이 아니다. 우리의 정치제도는 대통령책임제이긴 하지만 국회도 엄연히 민의에 의해 움직이는 헌법기관이다. 대통령이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만 국회도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표가 아닌가. DJP공조가 파기됐는데도 불구하고 공조가 존속되고 있는 것처럼 통치하고,야당이 과반수 의석에 육박하는 다수당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소수당인 여당이 다수당처럼 한가하게 인적 쇄신의 내용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며 시간을 천연하고 있는 것은 전근대적 정치의 전형이다. 우리는 명실상부한 민주정치를 원하는 것이지,무늬만 민주주의인 정치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자민련과의 공조가 깨지고 선거에서 졌으면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의정권을 넘겨주어야지,의정권을 넘겨주지도 않고 또 자기쇄신조차 하지 못하는 소수 여당의 처신이 구차하기 그지없다.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