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해 경제학(Economics of Disasters)'이라는 용어가 있다. 미국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이코노미스트인 케빈 클리슨 박사가 처음 만들어낸 이론이다. 지진 홍수 태풍 같은 자연재해가 지나간 뒤 일정기간이 흐르면 재해지역의 경제는 좋아진다는 논리다. 클리슨 박사는 재해경제를 3단계로 구분한다. 1단계는 재해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의 시기. 2단계는 간접 손실의 기간이다. 재해로 인한 실업증대,여가활동축소,관광객감소 등은 여기에 해당한다.그러나 그후 오는 3단계는 회복의 시기라는 것.재건의 기운을 타고 돈이 풀리고 고용이 많아지고 소매거래가 활발해진다. 장기간으로 보면 재해를 당한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지난 95년 일본 고베에서 있었던 대지진 때도 '재해 경제학' 이론은 그대로 적중했다. 당시 지진은 6천5백명이 사망하고 30만명 이상이 집을 잃는 대참사였다. 그러나 15개월만에 제조업 생산은 지진 발생 이전의 98%를 회복했다.96년 7월까지 모든 백화점이 문을 열었고 중소상점들도 80%가량이 영업을 재개했다.투자는 다시 붐을 일으켰다. 미국의 허리케인 앤드루 등 세계적으로 커다란 자연 재해 때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재해경제학'이 성립되는 것은 결국 경제는 사람이 운용하기 때문이다. 재해의 파편은 시간을 두고 치우면 되고 무너진 건물이나 기계는 다시 만들면 된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기술,한마디로 휴먼캐피털만 손상되지 않으면 시간이 문제지 경제는 곧 회복된다. 현대경제학에선 휴먼캐피털의 비중을 전체 경제요소의 70%를 넘는 것으로 추산할 정도다. 인간은 어떤 악조건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게 재해경제의 결론인 셈이다. 요즘 지구촌은 테러공포에 떨고 있다. 지난 9월11일 CNN방송이 미국경제의 심장부인 세계무역센터 빌딩 속으로 납치된 비행기가 돌진하는 장면을 생중계한 이후 '테러'는 이미 세계인의 공통 화두가 됐다. 테러는 '보복전쟁' '바이오 테러' 등 눈만 뜨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어쩌다 가정에서 밀가루만 봐도 겁부터 먹어야 하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테러 경제학(Economics of Terrors)'은 어떨까. 테러는 지진 태풍 등 자연재해와는 다르다. 백과사전적 의미는 '어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직접적인 공포수단을 이용하는 주의나 정책'이다. 테러를 설명할 때는 '위협 폭력 살상 등의 끔찍한 수단을 수반한다' '공포와 전율을 느끼게 한다'는 등의 살벌한 표현들이 뒤따른다. 하지만 '9·11테러' 이후 세계경제동향을 보면 '테러'도 일반적인 '재해경제'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급락했던 주가가 한달 만에 거의 테러 이전수준을 회복하는 등 국제금융시장은 안정세를 찾고 있다. 테러의 충격이 가장 컸던 월스트리트 일각에서는 오히려 이번 테러가 미국 경제의 경기침체기간을 단축시켜 주는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긍정적'인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미국의 계속되는 금리인하와 1천억달러에 이르는 대규모 경기부양책이 빠른 경기회복을 가져올 것이란 근거에서다. 그래서 충격적인 후속테러만 없다면 지금이 경기저점일지 모른다는 '경기바닥론'마저 솔솔 나오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테러 경제학'이 '재해 경제학'처럼 살아있는 이론이 되기 위해선 한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경제가 조금 나아진다고 해서 고통의 시절을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한 나라 경제가 어려움을 딛고 다시 출발할 때 그 아픔을 잊어서는 미래가 밝지 않다. 지금 우리 경제가 힘든 것도 IMF 시절의 고통을 너무 쉽게 잊었던 탓이 아닌가 싶다. ph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