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분에서 나온 부장품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적다. 발굴전 도굴을 당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본래 부장품이 적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고구려인들은 장례를 치를 때 매장이 끝나면 죽은 자가 생전에 입던 의복,아끼던 물건, 말 등을 모두 모아 무덤 옆에 둔다.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를 다투어 가지고 간다" '수서(隋書)'의 이런 기록은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되고 있다. 고구려 고분의 두드러진 특징은 이처럼 부장품은 적어도 때로는 그것보다 더 유용한 사료가 되는 벽화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묘제연구는 물론 풍속사 복식사 사상사 연구에도 벽화고분처럼 절대적 자료는 없다. 사료부족에 허덕이는 고구려의 경우 그나마 벽화가 없었다면 그들의 생활 신앙 등은 상상도 못했을 게다. 고구려 고분은 초기의 도읍지(국내성)였던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일대와 후기의 도읍지였던 평양의 대동강 유역에 밀집해 있다. 그중 학계에 보고된 벽화고분은 지안 일대 20기,평양지방 43기 등 63기에 이른다. 고분은 적석총과 석실 봉토분 형식인데 지하에 석실을 만들지 않고 지상이나 반지하에 석실을 만들었다. 벽화는 석실의 미장한 회가 마르기전 흑색 백색 황색 적색 자색 청색 녹색 등으로 채색을 하는 프레스코기법을 쓰고 있다. 금가루나 청동가루를 쓰기도 했다. 그림의 내용은 인물풍속도 장식무늬 사신(四神)도 천체도 등 다양하다. 지안에 있는 5세기께 고구려 벽화고분인 삼실총과 장천1호분의 벽화가 지난해 완전히 도굴당했다는 보도다. 삼실총은 'ㄷ'자형의 석실구조와 무사도 행렬도,장천1호분은 예불도 신선도 등으로 고구려 풍속과 사상사연구의 보고라는 기대를 모았었다. 중국 당국이 범인을 모두 잡았다지만 벽화는 아직 간 곳을 모른다니 답답한 일이다. 되찾는다 해도 도굴과정에서 이미 많이 파괴됐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문화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때만 가치가 있다. 근거는 없어도 중국에서는 한국과 관련된 범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장물아비야 누구든 우리도 수사에 협조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