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이 즉위하고 정희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시작한 1470년의 일이다. 나라에서 쓰는 포목이나 비단 등을 조달하는 제용감의 첨정(종6품) 김정광이 부상(富商) 김득부(金得富) 등의 뇌물을 받고 조잡한 베 2천5백필을 최상품으로 속여 사들였다는 정보가 의금부에 날아들었다. 김정광과 납품 상인 40여명을 잡아들여 국문한 결과 여죄가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뇌물을 받은 관리도 김정광만이 아니었다. 박위 박희손 등 권문세가의 공신 후예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왔다. 게다가 주범 김정광은 당시 좌의정 김국광의 친아우였다. 사헌부에선 이들을 '개국이래 최악의 탐관오리'라고 논죄한 뒤 법에 따라 참형하라고 주청했다. 하지만 정희왕후의 판결은 그보다 관대했다. 김정광은 장 1백대를 때려 변방의 종으로 삼았다. 박위 박희손은 직첩을 거두고 멀리 귀양 보냈다. 관련 상인들은 장 1백대씩을 때린 뒤 역노로 삼았다. 김국광도 당연히 좌의정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 상소가 올라 올 때마다 정희왕후는 "너희들도 자식과 아우가 있겠지만 그들이 하는 짓을 다 알 수 있겠는가"라고 설득했다는 얘기는 흥미롭다. 그 무렵 또 하나의 문제가 터졌다. 정작 이 사건의 주범으로 지연 혈연 등 연줄을 찾아 요소요소에 뇌물을 뿌렸던 김득부가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의혹이 증폭되자 의금부는 뒤늦게 김득부를 잡아다 장 1백대,징역 3년형으로 처리해 버렸다. 애당초 의금부 당상들이 뇌물을 받고 김득부를 빼돌린 것으로 의심하고 있던 승정원에서는 이 사건을 맡았던 임원준 황효원을 사헌부에서 추국해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다. 왕을 대신해 형옥(刑獄)을 다루는 의금부는 '한 나라의 저울대'이므로 어느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사건은 두 사람을 좌천시키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요즘 우리 사회는 '이용호 게이트'로 시끌벅적하다. 어떻든 '성종실록'에 기록된 5백여년 전의 '김득부 게이트'처럼 흐지부지 종결돼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