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휘청거릴 때 달러화 가치는 보통 오르게 된다. 하지만 미국에서 발생한 테러 이후 달러가치는 다른 주요통화에 대해 약세를 보여왔다. 이것은 달러가치 하락의 전조인가. 지금까지 미국 경제는 달러와 함께 안전한 피신처로 통했다. 하지만 테러가 모든 것을 바꿨다. 테러범들은 세계 최대 경제대국의 심장부를 겨눴고 결과적으로 투자자들이 미국의 안보능력에 의문을 품게 했다. 투자자들은 자신의 투자자금이 미국에서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뉴욕의 금융시장이 문을 닫은 동안 세계 각국 중앙은행들은 외환시장 안정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달러가치는 계속 떨어졌다. 반면 그동안 중개인들이 멀리했던 유로와 엔,그리고 금값은 급등세를 보였다. 위기가 닥쳤을 때 외환시장보다 더 맹목적인 공황상태에 빠지는 곳도 드물다. 외환 거래인들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곳으로 우르르 몰려 다닌다. 각국 금융장관들은 외환정책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자신의 명성에 오점을 남기고 만다. 판단이 빠른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은 통화가치가 현재 어느 정도는 돼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하지 않는다. 통화가치에 대한 발언은 중개인들에 대한 도전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중개인들은 정부당국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한꺼번에 통화를 사거나 판다. 세계무역센터 테러 직후 세계의 중앙은행들이 질서정연한 매매를 거듭 요청한 것과는 달리 각국 정부는 비교적 조용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들 정부도 이번 테러가 외환시장에 몰고올 중장기적 파장을 면밀히 검토했을 것이 틀임없다. 그리고 국내 및 국제정책을 어떤 식으로 취해야 할 지 고민했을 것이다. 테러범들이 비행기 자살테러를 감행한 직후 달러화 가치는 유로 및 엔화에 대해 약 2.5% 하락했다. 위험을 회피하려는 투자자들이 달러표시 자산을 잇따라 팔아치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달러가치 하락은 예외적인 상황도 아니고 달러화 붕괴는 더더욱 아니다. 게다가 미국통화의 가치하락은 테러공격 이전부터 분명한 추세로 굳어져왔다. 지난 3개월간 달러는 유로화에 대해 6.6% 떨어졌다. 이보다는 적지만 엔화에 대해서도 약세였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폴 오닐 재무장관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강한 달러'를 선호해왔다. 하지만 금리가 급속히 떨어지면서 달러화 가치는 동반 하락했다. 지난 17일 발표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금리인하는 벌써 올들어 여덟번째 단행된 조치다. 미국 기업과 주식에 대한 투자매력도 점차 떨어지고 있다. 경제침체가 불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통화가치 하락은 미국에 이점도 있다. 수출 경쟁력을 높이고 미국의 엄청난 경상수지 적자규모를 줄여준다. 한 통화가치가 떨어지면 다른 통화는 상대적으로 오른다. 달러가치 하락은 다른 나라의 정책결정에 어려움을 유발할 수도 있다. 지난 10년간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일본은 다시 한번 불황위험에 시달리고 있다. 디플레이션도 걱정이다. 일본 정부는 엔화가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 재무부는 지난 17일 전격 개입했고 이틀 후에도 달러가 1백17엔대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시장에 뛰어들었다. 유럽 역시 급격한 통화가치 변동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1999년 1월 출범한 이후 유로화는 모든 전망을 깨고 달러화에 대해 점진적으로 약세를 보여왔다. 유럽중앙은행(ECB)을 비롯한 모든 유럽의 정치인들이 이같은 유로화 가치하락이 경제의 기초체력(펀더멘털)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유로화 약세가 꼭 유로지역의 경제를 어둡게 만든 요소는 아니었다. 이곳 역시 세계적인 경기하강의 영향을 받았지만 유로 약세가 수출 경쟁력을 높여줬다. 유로화는 국제 보유통화로서의 위상이 높아졌다. 하지만 유럽경제를 살리는 데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다. 달러화는 지금 전환점에 서 있을 가능성이 높다. 테러공격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전개돼 온 경제하강의 여파 때문이다. 세계무역센터의 붕괴는 미국 이외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재보험회사들의 보험금 지급으로 미국에 자본유입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만약 비행기 테러가 전환점을 만들었다면 이는 달러약세를 유발했기 때문이 아니라 국제적인 위기상황 하에서도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 .............................................................. ◇이 글은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신호가 보도한 'Losing its lustre?(빛을 잃고 있나)'를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