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의 울산항이 국제무역항 이었다거나 경주의 석조 무사상들이 아랍인을 닮았다든지,처용설화의 처용이 아랍인이라는 설은 결코 황당한 얘기만은 아니다. 하지만 신라시대에 이슬람 상인이 왔었다는 사실은 한국의 역사기록에는 없는 탓으로 아직은 추정에 그치고 있다. 그들이 한국에 왔다는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고려사'에는 1024년 "서역 대식국(大食國)의 열라자(悅羅慈,Al Razi)등 1백명이 와서 토산품을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이듬해도 하선(夏先,Hassan),라자(羅慈,Razi)등 1백여명이 왔다고 했다. 대식국이란 아랍계 무슬림을 뜻한다. 개경에 가까운 예성항이 외국인들이 북적대던 국제무역항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가 몽고의 부마국이 된 뒤에는 원나라에 있던 무슬림들이 고려에 귀화해 벼슬을 얻었다. 1274년 충렬왕비 노국공주의 시종으로 왔던 삼가(三哥)는 무슬림이었다. 고려여인과 결혼해 귀화한 그는 계급이 선무장군에 이르렀고 충렬왕은 '장순룡(張舜龍)'이란 이름까지 하사했다. 그가 덕수(德水)장(張)씨의 시조다. 이밖에도 고려에 귀화해 정3품 정6품 등 고관에 오른 무슬림의 예는 많다. 또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에 나오는 '회회(回回)아비'는 무슬림을 가리키는 것이다. 조선조에는 무슬림과 관련된 기록이 거의 없다. 단지 '태종실록'에 "회회사문(回回沙門) 도로(都老)가 처자를 거느리고 와서 조선에 살기를 원하므로 집을 주어 살게 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그 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군의 압둘 라흐만과 주벨 코흐가 의정부에서 이슬람교의 포교활동을 시작한 이래 76년 서울 한남동에 모스크가 준공됐다. 지금은 경기도 광주,부산 성남 전주 안양 울산에 사원이 있고 신도는 3만5천여명이라지만 정작 예배에 참석하는 한국인은 적다. 미국 테러사건 이후 서울 한남동 일대의 이슬람 각국 대사관직원 등 한국거주 무슬림들이 혹시 있을지도 모를 보복에 잔뜩 겁을 먹고 있는 모양이다. 죄없는 이에게 가하는 폭력은 더 많은 폭력을 낳는다는 것을 한국인은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