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심장부를 강타한 동시다발 테러로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고 미국 상·하원도 군사력동원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오사마 빈 라덴을 은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정권은 결사 항전을 결의했다. 전쟁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전쟁이 발발하면 이것이 3차세계대전으로 비화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런 우려의 배경엔 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 새뮤얼 헌팅턴이 제기한 '문명의 충돌'이란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헌팅턴은 냉전종식 이후 분쟁은 이념이나 계급이 아니라 문명,그 중에서도 종교적 갈등에서 비롯될 것이란 가정아래 현재의 세계를 서구 중국 이슬람 아프리카 등 8개 문명권으로 나눈다. 그는 서구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으로 이슬람과 중국 문명권을 꼽으면서 이들 문명과의 충돌에 대비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헌팅턴은 책의 말미에서 조심스럽게 3차세계대전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강대국들이 대거 개입하는 세계대전이 이슬람권과 비이슬람권의 분쟁이나 미국·중국간 국익다툼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논리전개에는 허구가 있다는 것이 관련학자들의 지적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 하랄트 뮐러 교수는 '문명의 공존'이란 저서에서 문명은 기술발전과 경제운용방식,사회구조,가치체계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지만 헌팅턴은 가치체계,특히 종교만을 결정적 척도로 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부에선 문명충돌론을 서구패권주의 내지 현대판 황화론(黃禍論)으로까지 혹평한다. 헌팅턴의 '문명충돌'이란 개념이 지나치게 도식적인 약점이 있긴 하지만 이번 테러와 그 후의 시나리오를 예상하는데는 나름대로 단서를 제공한다. 미국의 보복공격이 결과적으로 문명충돌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이번 테러공격을 '21세기의 첫 전쟁'으로 규정하면서 "미국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악을 응징하고 승리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초강대국 미국의 손상된 자존심과 미국민들의 들끓는 분노를 감안할 때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번 테러가 미국을 향한 해묵은 증오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데 있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슬람,특히 아랍권에서 불평등 구조를 심화시켜 왔다는 것이 증오의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무차별 보복이 가해진다면 사태는 그야말로 미국과 이슬람의 충돌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으로 우려된다. 현재 세계에는 약 13억명의 무슬림이 있다. 세계인구의 5분의 1이 넘는 수치다. 테러를 자행하는 자들은 이들 무슬림중 극소수 과격 무장세력들로 국한된다. 이는 이슬람 자체를 잠재적 적대세력이나 테러리즘이란 프리즘을 통해 보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다. 힘에 의해 재단된 자의적 '선과 악'이란 기준에 따라 무차별적으로 악을 제거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원화된 사회코드에 적합하지 않다. 극단적 절망과 증오가 자라나는 상황이 존재하는 한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하고 라덴을 제거하는 것으로 테러리즘이 없어진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테러는 어떤 형태로든 용인될 수 없는 것이고 테러분자는 응징돼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응징이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차원에서 무차별적으로 단행돼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특히 이슬람권과의 확전이 '문명의 충돌'로 비화되는 사태는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