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악의 테러가 발생한지 3일만에 맨해튼으로 들어가는 다리와 터널들은 시원하게 뚫렸다.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참사 현장을 제외하곤 시내모습이 평소와 다름 없다. 미드타운 파크애버뉴에는 전처럼 서류가방을 든 은행원들이 바삐 돌아다녔다. 세계 최고급 쇼핑타운인 5번가에도 쇼핑객과 관광객들로 붐볐다. 남쪽 참사현장에서 일어나는 연기가 사진찍는 배경으로 하나 더 추가됐을 뿐이다. 센트럴파크에는 웃옷을 벗고 조깅을 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평소와 비슷했다. 공원옆에 있는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도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월드트레이드빌딩에 가장 많이 입주해 있던 증권사 모건스탠리의 본사가 있는 타임스퀘어도 평소와 다름없이 차가 막히고 사람들이 몰렸다. 평소보다 훨씬 자주 들리는 소방차와 경찰차량의 사이렌 소리를 제외하면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맨해튼의 모습이다.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실종자수가 4천7백명이 넘는다고 공식 확인하면서 "살아남은 사람은 쇼핑도 하고 뭔가를 하라(go shopping and do something)"며 정상적인 생활을 당부했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게 하나 있다. 미국 국기인 성조기의 물결이다. 관공서뿐만 아니라 백화점 일반상가들도 온통 성조기로 장식했다. 최고급 삭스백화점은 5번가쪽으로 무려 16개의 성조기를 촘촘히 걸어놓았다. 일반 차량도 안테나에 성조기를 달고 달렸다. 학생들은 책가방에, 쇼핑을 나온 주부들은 쇼핑백에 성조기를 끼워 놓았다. 건설현장의 외벽 전체를 성조기로 둘러싼 곳도 있다. 주식시장이 열리면 주가 움직임을 보여주는 나스닥의 대형 전광판도 이날은 성조기가 흩날리는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다민족국가인 미국인들은 유일한 공통분모인 성조기에 대한 애착이 유달리 강하다. 성조기가 물결치고 있으면 미국인들이 기쁨이나 슬픔을 함께 나누고 싶어할 때다. 지금 겉으론 애써 평온을 유지하지만 속으론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신은 '그들'을 용서해도 우리는 못한다"는 어느 상원의원의 말이 TV를 타고 나온다. 이들이 불끈 쥔 주먹으로 무엇을 할까. 뉴욕=육동인 특파원 dong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