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재벌시책의 기본틀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일부에서는 공정위가 '밥그릇 지키기'에 연연하고 있다든지,'경제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등의 주장을 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국민의 정부' 출범이후 '5+3원칙'의 추진으로 소액주주권과 회계기준의 강화,사외이사제 도입 등으로 기업경영에 대한 내·외부 감시장치가 마련됨으로써 기업개혁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간의 많은 제도 도입과 관행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재벌의 문제점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상태라고 본다. 계열사간 거미줄식 출자를 통해 가공자본이 형성되고,총수 일가가 불과 5% 내외의 투자지분을 갖고 계열사 출자지분을 지렛대로 약 60배에 달하는 기업자산에 대해 전권을 행사하는 시스템이 계속되고 있다. 그룹의 총수가 있는 25개 기업집단을 보면,전체계열사 5백90개사 중 총수와 그 가족 지분이 1주도 없는 계열사가 절반이 넘는 3백14개사에 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수들은 계열사 출자지분을 지렛대로 이들 기업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이 과연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구조를 시정하지 않고서는 그간 힘겹게 도입한 기업지배구조 개선시책의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왜냐하면 총수가 소액주주 등 타인자본의 권익을 도외시한 채 경영의 전권을 계속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 의한 구조조정도 정착되기 어렵다. 계열사들이 거미줄식 출자,부당내부거래 등으로 얽혀 있어 채권금융기관들이 이들의 볼모가 됨으로써 부실 계열사만 떼어내 퇴출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도 이러한 구조가 시정되지 않으면 실현되기 어렵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정치적 민주주의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민주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한 나라의 경제적 자원이 소수에게 집중되고,그 소수가 전권을 행사한다면 경제적 민주주의가 실현됐다고 할 수 없다. 공정위는 이같이 잘못된 시스템을 시정할 수 있는 대안만 있다면 출자총액제한제도 등을 과감히 풀 용의가 있다. 대안을 제시하면서 합리적인 자세로 비판을 해야지,한쪽에 치우쳐 일방적인 비판만 하는 것은 논의의 초점을 흐리고 국민을 오도할 위험이 있다. 물론 출자총액제한제도에 대해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투자를 저해한다든지,현 증시상황상 주식매각 손실이 예상된다든지,한꺼번에 매각될 경우 증시물량 부담에 대한 우려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출자총액제한제도가 기업의 투자를 저해한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희박하다고 본다. 지난 7월 한 민간경제연구소의 설문조사 결과 시장침체(35%)나 기업활력 저하(22%)등이 투자위축의 주원인으로 나타났으며,정부규제가 주원인이라고 응답한 기업은 9.5%에 불과했다. 과거 출자총액제한과 설비투자의 추이를 보더라도 출자총액제한제도의 시행으로 타 회사에 대한 출자가 제한되던 1995∼97년 출자총액은 5조6천억원 늘어난 가운데 설비투자는 69조6천억원이 이루어진 반면,출자총액제한이 없던 기간(1998∼2000년)에는 출자총액이 28조2천억원 늘어났으나 설비투자는 65조4천억원으로 줄었다. 이는 기업의 설비투자와 출자총액제한 간에는 큰 상관관계가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출자총액제도는 타 회사의 주식취득만을 제한할 뿐 사업부 형태로 자기사업에 투자하는 것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현재 우리 자금시장에는 유동성이 풍부하다. 프로젝트의 수익성만 있다면 회사채 발행 등 다른 재원조달방안이 많은데 계열사의 출자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면 그 회사나 프로젝트는 시장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는 뜻이다. 앞으로 한도초과 주식매각시 매각손실,증시물량 부담 문제에 대해서는 공정위도 충분히 관심을 가지고 보완대책을 강구하겠으며,또한 관계부처 및 재계와 긴밀하게 협의해 나갈 것이다. 보다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논의가 진행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