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에서는 일본 찻집과 정원,독일 상인의 집,영국 교회,일본 총영사관이 두드러져 보였다.언덕 위의 지붕이 휜 조선 관청만이 자본과 힘은 외래의 것이지만 제물포의 정부만은 자국의 것임을 이역인에게 상기시킨다" 1894년 제물포로 입국했던 비숍은 그의 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 이렇게 제물포의 첫인상을 적어 놓았다. 그는 그무렵 제물포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4천여명이라는 기록도 남겼다. 비숍보다 몇년 뒤 조선을 찾았던 영국의 외교관 커즌은 당시 조선을 "블라디보스토크와 나가사키에서 함부로 차는 축구공"이라 표현했다. 나라가 온통 외세의 각축장이 됐던 시절의 증언이다. 지금의 인천시 중구 항동을 중심으로 한 작은 어항이었던 제물포가 이처럼 국제무역항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1876년 개항을 규정한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부터였다. 월미도는 옛 제물포항 앞바다에 떠있는 둘레 4㎞,면적 0.66㎢의 아담한 섬이다. 육지에서 1㎞쯤 떨어져 있었으나 이미 1922년 육속됐고 남쪽에 딸려있는 소월미도와의 사이에는 갑문이 생겼으며 인천내항의 북서쪽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서양인들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로즈 제독의 이름을 따 이 섬을 '로즈 아일랜드'라고 부르기도 했다. 숙종 초인 1680년께 지었다는 왕의 피난용 행궁(行宮)자리가 이 섬에서 근래에 확인됐고 '임해사'란 절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월미도 앞바다는 개항 이전에는 일본 프랑스 영국 등 포함(砲艦) 외교를 무기로 삼았던 강국의 각축무대였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 월미도는 인천의 상징이었을 만큼 유원지로 유명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가 됐던 곳이기도 하다. 그 뒤 미군주둔지 해군작전지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됐던 월미도가 50여년만에 오는 10월부터 개방된다는 소식이다. 인천시는 국제공항과 내항 등이 한눈에 보이는 이곳에 행궁을 복원하고 전망대를 세우는 등 이 섬을 관광명소로 가꾸어 나가는 일로 분주하다. 한국근대사의 현장인 월미도가 환경친화적이란 말이 무색치 않게 개발돼야 할텐데,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