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은 같은 해,같은 도에서 태어나 같은 학자의 길을 걸었으나 생전에 만난 적이라고는 없다. 영남학파의 2대 산맥인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이룬 이들은 사림이 정권을 장악한 16세기 후반 조야에서 학덕을 겸비한 신진사류의 영수로 숭앙받았던 인물이다. 퇴계와 남명을 비교해 보면 서로 대조적인 면이 많다. 한가지 예를들면 퇴계는 학문의 목표를 '경(敬)'에 두었지만 남명은 '의(義)'를 더 중시했다. 이런 성향에 따라 퇴계는 보수적이고 지나치게 많은 조심성이,남명은 실천을 내세우는 지나친 과단성이 당시 이미 지적됐다. 이것만 봐도 두 사람의 성정이나 학풍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남명이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를 '깊숙한 궁정의 한 과부'라고 표현한 상소를 보고 퇴계는 말이 지났쳤다면서도 '지금 세상에서는 얻어보기 어려운 글'이라고 감쌌다. 남명도 '퇴계는 제왕을 돕는 학문을 지닌 사람'으로 평가했다. 두 문중이 이런 스승들의 학풍을 얼마나 잘 이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뒷날 '경상좌도는 퇴계,경상우도는 남명'이라는 지역성을 강하게 띠게 되고 문인들은 각기 상대방을 비방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남명학파나 퇴계학파가 처음에는 모두 동인이었으나 동인이 퇴계의 학풍을 이은 유성룡의 남인과 남명을 계승한 정인홍의 북인으로 분열되면서 시작된 남인과 북인의 엎치락 뒤치락했던 권력싸움과 정치적 보복이 화근이었다. 좌도는 근근이 남인의 근거지로서의 위치를 지켜왔으나 우도는 인조 반정으로 정인홍의 북인세력이 제거되는 바람에 남명학파도 함께 철저하게 보복 당했다. 좌도와 우도가 지역성을 띠게 된 것은 결국 붕당정치 때문이었다. 금년은 퇴계와 남명이 함께 탄신 5백주년을 맞는 해다. 퇴계문중에서 먼저 기념행사를 연 남명문중을 축하방문하고 화합을 약속했다는 흐뭇한 소식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자칫 잘못하면 지역이나 정파에 따라 분열될 위기에 처해 있다. '남남분열'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과거 퇴·남학파의 아픈 경험을 되새겨 보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