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 시계 수리공을 한 아버지가 있었다.그 아버지가 생의 마지막을 느껴 시계 하나를 만들어 아들에게 주었다.그 시계를 받아든 아들이 놀라며 물었다.이상하게도 그 시계는 시침은 납으로 돼 있고 초침은 금으로 돼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왜 초침이 금으로 돼 있는 거지요. 아버지가 늘 시간은 금보다 소중하다고 하셨으니 시침이 금으로 돼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가 대답했다. "초가 없는 시간은 없단다. 초를 얕보면 시간을 가질 자격이 없는 거란다. 1초 앞에 겸손하면 시간이 너를 기억할 것이다" '바쁘다'라는 말을 무슨 경구처럼 뱉으며 살면서도 이 말이 늘 가슴에서 꿈틀거렸다.남들보다 급한 성격으로,기다리는 것을 고문처럼 생각하며 살다가도,나를 잡아 이끄는 이 깨우침을 잊지 않으려 애를 쓴다.'조금만 천천히,자 조금만 천천히'라고 나는 나에게 속삭인다. 천천히 가면서 많은 것을 보고,천천히 가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는 삶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귓속말을 하는 것이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에 무슨 생각이 있겠는가. 지루하지만 강 같은 지속적인 흐름 속에서 생의 시간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뭔가 아차! 하고 가슴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있다. 그러고 보면 올 한해도 많이 기울어 있다. '시간'이라는 단어가 자주 입안에 고인다. '있는 것이라곤 시간'밖에 없던 젊은 날,자고 일어나면 쏟아져 들어오는 시간이란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아무 것도 없이 그저 시간만 있던 그 시절 나는 시간을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빈 밥그릇 같은 것'이라고 저주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 빈 밥그릇 속에는 밥이 아니고도 채워지는 것이 있었다. 눈물이건 바람이건 원망이건 희망이건 세월이 녹아 흐르는,먼지 같은 시간의 모래가 담기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시간은 빈 추억이 아니라,경험이라는 새로운 분위기의 성찰을 얻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과오나 실수를 경험이라는 낱말로 용서받으려고 하면 안되리라.아마도 그것은 끝없는 과오를 범하는 남모르는 자신만의 범죄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즈음 아름다운 구름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마치 이 세상의 가장 큰 벽화나,움직이는 영상 그림을 보는 느낌이다. 어느 박물관에 그런 아름다운 변화의 그림이 있겠는가. 피카소도 고흐도 모딜리아니도 세잔과 자코메티도 상상할 수 없는 하늘의 그림을 바라보면서 나는 짜증내지 않고 여름을 보냈다. 때로는 너무 행복해서 살아있음의 현실에 '감사'라는 묵도를 올리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명화 감상치고는 사뭇 감동적이었고,세상의 번잡스러움에 비해 그것은 단호하고 순수했다. 요즘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순수 그 자체의 황홀경에 나는 매료돼 있었다. 그러나 더 매력적인 것은 그 순간을 놓치면 모두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 찾는 자에게,스스로 의미를 두는 자에게 그것은 그 무엇이 돼 나의 것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늘은 늘 비어 있는 듯 하지만,해 아니면 달 이미지만 부각돼 있는 하늘이기도 하지만,슬며시 나타났다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구름을 눈여겨 보면 거기 우리들의 자화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판에 박힌 허무주의를 말하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설핏하게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그것을 스스로 풀어 의미를 만들어 가는 새로운 희망 찾아가기를 말하자는 것이다. 손이 비었다고 진정 빈 것이 아니고,그 손이 가득하다고 해서 가득한 것이 아닌 우리들의 삶에서,하늘 그림에서 의미를 찾고,그 아름다움에 나를 이끌어 올리려는 노력이 오늘 우리들의 행복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인생에 대한,희망에 대한 초보적 성실이라고 생각한다. 걸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아름다움의 가치를 찾아 바라보는 자유야말로 살아있는 사람의 새로운 희망찾기요,살아있는 사람의 '살아있는 생명'인 것이다. 또 그것이야말로 초침을 금으로 만들려는 우리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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