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실 < 한국경제연구원 금융재정연구센터 소장 > 은행들의 평균 예금금리(금융채 제외)가 사상처음으로 4%대까지 떨어졌다. 기대되었던 하반기 경기회복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있는데다 정부도 경기진작 수단으로 재정지출 확대보다는 금리인하에 비중을 두고 있는 분위기다. 이대로 간다면, 이미 예금금리가 물가를 감안한 실질금리수준이 거의 제로금리에 가까운 상황에서 금리의 추가적 하락마저 예상되고 있다. 오랜 기간 고금리에 시달려온 우리로서는 '저금리'를 지나 '제로금리' 시대로 간다는 것이 현실같지 않다. 이자생활자들의 대부분이 유례없는 저금리 때문에 큰 고통을 겪고 있는 현 상황에서 저금리는 과연 좋기만 한 것일까. 저금리에는 '좋은 저금리'와 '나쁜 저금리'가 있다. 금리는 한 마디로 돈의 가치다. 돈의 가치가 떨어져 기업들이 투자를 크게 늘리고, 소비자들도 씀씀이를 늘려 경기의 선순환이 나타난다면 이는 좋은 저금리다. 그러나 돈의 가치가 아무리 떨어져도 투자와 소비가 살아나지 않는다면 이는 나쁜 저금리다. 외환위기 이후 과거에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던 수준의 저금리기조가 정착되고 있지만 우리 경제에서 좋은 저금리 역할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감이 앞선다. 이론대로라면 현재와 같은 저금리 하에선 투자가 활성화되고 주식시장이 활기를 띠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급격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금년 들어 정부는 2월과 7월 두차례의 콜금리 인하를 통해 전반적인 시장금리의 하향 안정화를 유도해 기업자금사정을 원활화함으로써 경기회복을 도모하려고 했다. 콜금리 인하이후 시중은행들이 단기성 예금금리를 중심으로 금리를 잇따라 내리면서 한 때 시중자금이 장기성 예금과 채권으로 이동하면서 시중자금 단기화현상이 다소 둔화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약간의 외부적 충격만 있어도 '안전자산 선호현상(flight to quality)'이 나타나 금리가 급등하는 모습을 반복하면서 자금시장의 불안감만 키우고 말았다. 더구나 지금처럼 퇴출돼야 할 기업이 제때 퇴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처럼 지나치게 낮은 금리가 장기간 유지될 경우 저축의욕을 떨어뜨리고 과소비를 부추기며 부동산투기 같은 부작용만 촉발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불경기 속에서도 고가 사치품 수입이 늘고 있고 저밀도 지구 재건축 아파트에서 시작된 부동산 투기바람이 재건축과 관계없는 인근지역 매매가와 전세가를 밀어 올리며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추세에 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문제는 우리 경제가 아직도 천문학적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하면서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구조조정기에 있어 금리는 단순한 거시경제변수 이상의 의미를 넘어 과거 우리경제에 축적된 부실을 분담하는 중요한 잣대의 역할을 하게 된다. 미래성장의 동인이 돼야 할 우량기업이 '좋은 저금리'의 혜택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빚이 많은 한계 기업이 '나쁜 저금리'의 이점을 빼먹게 한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국내외 경기가 불투명한 상황에선 금리를 낮추는 것만으로 기업의 투자를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좋은 저금리의 경제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기업들의 투자의욕을 북돋워 자금이 생산적인 부문으로 흐르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부실요인들을 조속히 해결함으로써 경제전망에 대한 불안감과 불확실성을 해소해야 한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로서는 미국 및 일본발 경기침체와 아르헨티나 외환위기 등 전 세계적 경제불안 확산에 대처할 정책수단이 많지 않은 가운데 저금리정책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올들어서만 여섯차례 금리를 인하한 미국이나, 제로금리정책의 실패사례인 일본의 경우를 감안할 때 우리경제에 적정한 '좋은 금리' 수준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 insill@keri.org > ---------------------------------------------------------------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