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는 졌어도 재판은 잘 하더라'는 속담이 있다. 서로 다투다 지기는 했어도 그 판결이 공평해 조금도 억울함이 없다는 이야기다. 예나 지금이나 반드시 법조문을 적용해서 재판을 하게 마련이지만 특별히 민사재판은 구체적 타당성을 고려해 쌍방을 조정해야 하기 때문에 누구나 승복할 수 있는 재판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사간을 지낸 신응시(辛應時,1532~1585)는 조선왕조의 명판관으로 이름난 인물이다. 그가 호남어사로 전라도 남원에 들렀던 때의 일이다. 어떤 부자가 불교를 광신해 재산을 송두리째 만복사(萬福寺)에 시주한 뒤 끝내는 굶어 죽었다. 고아가 돼 구걸하며 떠돌아다니던 그의 아들이 남원 부사에게 전답을 돌려줄 것을 호소하는 솟장을 냈으나 번번이 패소하자 신 어사에게 다시 솟장을 냈다. 신 어사의 판결내용은 명쾌했다. '전답을 내놓아 시주한 것은 본래가 복을 구한 것이었는데 시주자는 벌써 굶어죽고 아들이 또 빌어먹고 있으니 부처의 영험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땅은 임자에게 돌려주고 복은 부처에게 바치라' 받은 복이 있다면 부처에게 되바치라는 역설적 대목이 흥미로운 명판결이다. 짝사랑하는 유부남이 사랑하도록 해주겠다며 한 여인의 굿을 해준 무속인에게 서울지방법원이 효험을 보이지 못했으므로 굿 값을 돌려주라는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이다. 무속인의 얘기를 믿은 원고의 과실도 있는 만큼 굿 값 6백만원중 4백만원만 돌려주라고 조정했다고 한다. 신응시의 판결을 다시 보는 듯하다. 일제의 식민정책,광복후의 근대화정책에 따라 무속은 미신으로 치부돼 사회에서 발을 붙이지 못했다. 70년대들어 전통민속의 보존차원에서 보호되던 무속인들은 90년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선거철,입시철이면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 무당집 점집이다. 사회의 불안정성과 예측불가능함을 무속에 의존해 해결하려는 데서 나온 폐습이다. 하지만 효험이 없다고 한들 무속인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번 법원의 결정이 무속폐해 근절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 궁금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