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예부터 새를 영물(靈物)로 여겼다. 일부 지방에는 아직 장대 위에 나무로 새를 만들어 얹은 솟대를 세우는 풍속이 남아 있다. 고대인들이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는 새를 인간세계와 천계를 연결하는 매개자로 믿었던 신앙의 흔적이다. 대전 인근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농경무늬청동기 파편 앞면에는 따비로 밭이랑을 내고 있는 사람과 괭이로 땅을 파고 있는 사람이,뒷면에는 나뭇가지에 새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새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가 해의 상징으로 그려져 있다. '삼한의 변진(弁辰)에서는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낼 때 큰 새의 깃을 함께 묻어 죽은 사람이 하늘로 날아가기를 바란다'는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기록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국인들의 새 신앙이 공통적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보면 남자들은 모자에 새 깃을 꽂은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있다. 새 깃이 단순한 장식이었든 신분이나 직업의 표현이었든 간에 새의 깃을 썼다는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경주 서봉총에서 발견된 왕의 금관에도 새가 앉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고분을 서봉총(瑞鳳塚)이라고 부른다. 새 모양의 토우나 칠기잔도 나왔다. 모두 삼국시대인들의 새와 관련된 내세관을 엿보게 하는 유물들이다. 둔황석굴 237호 굴 '유마경변상도'에 조우관을 쓴 삼국시대 인물이 끼어 있는 것이 새로 확인돼 화제가 되고 있다. 조우관을 쓴 삼국시대인은 65년 중앙아시아에서 발굴된 아프라시아브 궁전벽화에서 2명의 사절이 발견된 이래 둔황에서만 4군데 석굴에서 각각 발견됐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대만 고궁박물관에서 발견된 6세기초 '양직공도(梁職貢圖)'중 '삼국사신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사신이 옷은 비슷해도 모자는 각기 다르다. 조우관을 쓴건 고구려 사신뿐이다. 굴이 8세기께 조성됐다고 해서 전의 그림을 모사했을지도 모를 벽화속의 인물을 통일신라인이니 화랑이니 섣불리 속단할 일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