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이어선지 몹시 무덥다. 몸도 머리도 무거워 밖으로 나서자 반사적으로 무열왕릉으로 향한다. 능역이 넓고 시야가 트여서 즐겨 산책하는 곳인데,지난 4월에 들르고 여름엔 처음이다. 경주는 건축물의 고도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어서인지 여느 도시보다 녹지가 많아 보인다. 특히 김인문묘 등 고분이 많은 서악동에는 초목도 무성하다. 능역에 들어서자 소나무 숲과 초록으로 덮인 무열왕릉이 눈을 서늘하게 하고,매미소리가 들린다. 7년째 땅속에서 긴 잠을 자고 나왔으니 한껏 목청 돋워 생명을 노래해야지. 너희 목숨은 불과 1,2주일. 오직 번식의 사명만 마치고 돌아가니 생명의 경제학자라고 칭해도 되겠다. 올 때마다 비신(碑身)이 박힌 거북조각 앞으로 간다. 현대조각가들도 '이렇게 잘 할 수는 없다'고 감탄했던 거북의 힘찬 네 발가락이며,비신의 머리장식인 이수 전면에 꿈틀거리는 듯한 용 조각이 통일신라기의 기상을 나타내고 있다. 무더운 날씨 탓인지 무열왕릉 앞에 한 가족관광객이 서성이고 있을 뿐 한산하다. 왕릉 뒷편의 소나무 아래 앉으니 더위가 이내 스러지는 듯하다. 바람 한점 없지만 자연의 그늘이 몸의 열을 식혀준다. 앞으로는 남산이,뒤로는 성모전설이 깃든 선도산이 왕릉을 지켜보고 있다. 얼마 전 후배가 왔을 때 이곳에 데려오지 않은 것이 아쉽다. 생활고에 허덕이다가 '이게 삶이 아니다' 깨닫고 인도의 어떤 공동체에 들어가 종교적 명상화를 그리는 후배였다. 후배는 개인전을 열기 위해 귀국했는데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어했다. "고국은 무언가 자유롭지 않아요. 커다란 짐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아요" 그건 유교사회의 무거운 기가 아닐까. 권위적이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가부장적 사회의 부정적인 기.정치에서부터 사회 모든 분야에 이르기까지 억압적인 유교의 기가 넘쳐나는 듯 하다. 21세기 서두에 여성운동을 했던 내 친구는 "한국의 남녀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흐른다. 서로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심연이.그건 조선조 5백년 간 심어진 유교가 만든 폐해"라고 현장체험에서 우러난 진단을 했다. 묘 앞에 왕의 일대기를 쓴 비를 세우고 상석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무열왕 때부터인데,이 왕릉은 신라에 중국문물이 들어와 자리잡은 과정을 보여준다. 중국문물이 들어온지 1천4백년이 넘지만,신라나 고려 사회를 뒷받침한 정신은 불교여서 유교에 압도당하지 않았고 인성이 자유로웠다. 계율을 범하여 설총을 낳은 이후 스스로 소성거사라 불렀던 원효,역신과 동침하는 아내를 보고 체념의 노래를 부른 처용 등은 자유로운 신라사회의 파격이다. 무심히 앉아 있으려니 큰 개미들이 손으로 다리로 성가시게 기어오른다. 사람 눈에 개미가 한낱 미물이듯이,개미 눈에는 사람이 공략해야 할 물체로 보일는지 모른다. 갈라터진 소나무 줄기로도 수십마리의 개미들이 분주히 오르내린다. '이 무더위에도 개미들은 불평 않고 제 임무를 다하고 있구나'. 개미들을 떨쳐내다가 그들의 자리에 앉아 있는 내가 불청객임을 인식하고 일어선다. 무열왕릉을 지나 오솔길로 올라가니 배롱나무 몇그루가 서있다. 사슴뿔 같은 가지마다 잎이 가득 피었는데 가지끝에 작고 단단한 것이 맺혀있다. 이미 꽃이 진건가? 이맘때면 늘 환상같이 흐드러진 진분홍꽃을 뙤약볕 아래에서 본듯하지만,어찌된 일인지 올해엔 본 기억이 없다. 백일 동안 핀다는 백일홍인데,난 무엇이 바빠 좋아하는 꽃을 놓쳤을까. 네개의 능선이 선도산 아래로 고래등 같이 매끄럽게 솟아 있다. 1천5백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이지러지고 자연이 된 고분,그 부드러운 능선이 가슴을 열게 하니 여름의 대지에 엎드리고 싶다. 인생의 유한함을 생각하면 권력도 명예도 무상(無常)할 뿐-. 이곳에 묻혔다고 추정되는 법흥 진흥 두 왕은 불교를 일으키고 비약적인 국가발전을 이루었지만 말년엔 승려가 됐다. 형제처럼 정답게 솟아있는 고분 곁을 걸어가니 삼국유사에 실린 원효 찬미 시가 떠오른다. 삼매경에 주석 달아 그 책 이름 각승이라.호로병 들고 춤추면서 거리거리 쏘다니네.달 밝은 요석궁에서 봄 잠이 깊었는데,절문 닫고 생각하니 걸어온 길 허망도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