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동 작은 못 하나가 없어서 왕국을 잃어버렸다는 말이 있다. 언뜻 터무니없는 억지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꼼꼼히 생각해 보면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이 곧 드러난다. 못이 없어서 말굽의 편자를 박을 수 없었고,편자가 없으니 말을 달리게 할 수 없었다. 말이 달릴 수 없으니 병사가 싸움에 나갈 수 없었고, 병사가 싸움에 나가지 못하니 전쟁에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왕국을 잃어버리는 것은 불 보듯 뻔한 노릇이다. 몇년 전부터 불어닥친 외환 위기와 그 뒤를 이은 IMF(국제통화기금)의 구제 금융,그리고 최근의 경제 불황으로 지금 우리경제는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아직은 그 여파가 별로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것 같지만,앞으로 그 고통은 여간 크지 않을 것이다. 벌써부터 우리의 삶 곳곳에 그 고통이 시작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위기라는 지금의 사태가 비롯된 데는 여러 원인이 있을 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문화에 대한 푸대접'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동안 우리는 경제 개발에 주력해 온 나머지 문화는 늘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밀려 났다. 말로만 '문화 대국'을 외쳐댔지,막상 문화는 서자취급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은행에서 잠시 기다릴 때,시사 주간지나 월간지를 읽는 것이 고작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대학생들도 한잔에 몇천원 하는 커피는 선뜻 사 마시면서도 책을 사는 데는 여간 인색하지가 않다. 최근 출판연구소의 한 자료가 이를 잘 뒷받침해 준다. 작년 일본의 성인들은 한달에 1.6권의 책을 읽은 반면,우리나라 성인들은 같은 기간에 0.8권의 책을 읽은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이 우리보다 책을 두배 더 많이 읽는 셈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 이상의 깊은 뜻을 지닌다. 지식 습득으로 말하자면 책보다는 컴퓨터가 훨씬 더 좋은 매체가 될 것이다. 오죽하면 인터넷을 두고 '정보의 바다'라고 일컫겠는가. 책을 읽으며 사람들은 삶을 관조한다. 말하자면 독서란 위대한 정신과 갖는 대화요,자신을 되돌아보는 내면 성찰이다. 이런 대화와 내면 성찰을 통해 삶의 지혜를 쌓고 도덕과 윤리를 바로 세운다. 책을 멀리하다 보니 관심이 다른 데로 쏠리지 않을 수 없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향락문화만이 독버섯처럼 번져나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는지도 모른다. 책에 대한 무관심이 결국 도덕적 타락과 윤리의 부재를 낳았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적 타락과 윤리의 부재가 마침내 오늘날의 경제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지금 출판계의 사정은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다. 그야말로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현금을 주고 책을 만들어 놓으면 몇개월이 지나야 만기가 되는 어음을 받는다. 그나마 받은 어음마저도 대형 유통업체들이 줄줄이 쓰러지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돼 버린다. 아예 책을 만들지 않는 것이 돈을 버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태가 이 정도이고 보면 보통 일이 아니다. 한 나라의 출판은 그 나라의 문화라는 집을 떠받들고 있는 기둥이다. 그러므로 출판이 무너지게 되면 문화 전체가 내려 앉는다. 독자 감소에다 과당 경쟁과 낙후된 유통업이 문제라고는 하지만,그 근본 원인은 정부의 출판정책 부재에 있다. 가령 출판사들이 그 동안 몇번씩이나 정부측에 "책도 일간신문처럼 특종 우편물로 허가해 달라"고 건의했으나 그때마다 거절당했다고 한다. 일본만 해도 우편을 통한 서적 판매가 아주 활발하다. 현재의 유통구조로는 이 길밖에 없는 듯하다. 그런데도 정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우리 선조는 책속에 보물이 들어 있다고 하여 책을 무척이나 소중히 여겼다. 끼니는 굶어도 책을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의 난국을 이겨내는 길도 그동안 푸대접받은 문화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에서 찾아야 한다. 인류 역사상 문화를 푸대접한 나라치고 경제나 정치가 제대로 풀린 나라가 없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도 있지만,책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다. 말굽에 박을 못 하나가 없어서 나라를 잃어버렸다는 옛말을 되새겨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