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현실만 있고 큰 이론은 죽었다' 얼마전 우리나라 인문학계의 원로 한 사람은 이런 말로 우리 학계를 진단했다. 그는 남아 있는 것은 세계자본주의 이론뿐인데 이것은 오늘의 현실을 경영과 관리의 기술면에서 설명하는 부분적인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고찰이 없으며,인간은 이해되고 해석되고 형성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경영되는 현실 속에서 하나의 고정된 변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문학의 붕괴를 짚어낸 말이다. 돈만이 권력 명예 행복 성공의 열쇠라고 믿는 요즘 같은 세태에서는 학문도 돈벌이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에 따라 평가될 수밖에 없다. 학부제 시행으로 학생들이 인기학과로 몰리고 지원자가 급감한 기초학문분야 학과들은 폐과 위기에 몰렸다. 실제로 최근 호서대는 철학과를 폐과시켜 버렸다. 서울대는 결원 보충을 위한 올해 후기모집에서도 인문대 자연대 박사과정이 또 미달사태를 빚었다. 학문의 대가 끊길 위험수위에 도달해 있다. 서울대의 경우 96년 이후 5년동안 배출된 인문학 박사 3백55명 가운데 고작 1백23명만이 정규교수로 채용됐을 정도이니 박사가 돼도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다. 기초학문에 대한 정부의 홀대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인문학의 경우 올해 학술연구비 지원은 40억원으로 전체 지원액의 3%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서울대 교수 3백50여명이 정부와 대학측 정책이 기초학문을 홀대하고 있다고 반발하고 나선 것은 기초학문의 위기가 한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가 한국학 연구를 장기과제로 삼아 매년 10억~16억원을 지원키로 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도 최근 교육인적자원 분야 장관들과의 간담회에서 인문·자연과학 등 기초학문 분야를 지원하는 방안 마련을 지시했다는 소식이다. 교수들의 불만무마용 대안이 아니었으면 한다. 그보다 먼저 대통령이나 대학 총장들의 기초학문에 대한 인식이 바로잡혀야 할텐데 경영마인드만 앞세우는 이들이 과연 '기초학문이 실용학문의 뿌리'라는 것을 깨닫는 날은 언제일지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