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한 마음으로 토요일 저녁의 여유를 음미하던 차에 급박한 전화벨이 울렸다.

절친한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가 나의 손을 이끌고 간 곳은 허름한 건물의 지하 강의실.

1백명 가까운 사람들이 열심히 강의를 듣고 있었다.

강의내용은 ''다단계판매의 현황과 장점''.

강의가 끝난뒤 친구는 이 사업을 같이 하자며 나를 졸라댔다.

그로부터 며칠 뒤엔 친척 어른 한분이 찾아왔다.

얘기인즉 정수기 상품을 구입하라는 권유였다.

다단계판매업체 제품인 이 정수기는 90만원에 가까웠지만 할부구매키로 결정했다.

다단계판매시장의 열풍이 뜨겁다.

생활 주변으로 바싹 다가온 느낌이다.

이를 반영,전문가들은 다단계판매시장 규모가 올해 3조원을 거뜬히 돌파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98년 4천3백억원선에 그치던 시장이 99년 9천억원,2000년 2조원으로 매년 2배 이상 덩치가 커졌다.

이 시장에 사업자로 뛰어든 사람들과 단순 소비자를 합한 인구는 주식투자 인구(4백만명)에 버금가는 것으로 분석된다.

직·간접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선두기업인 한국암웨이의 경우 이달 현재 등록회원이 82만명이다.

이중 전업 또는 겸업으로 개인사업자로 나선 사람만 16만명.올해 매출액도 5천억원을 무난히 넘어설 전망이다.

외형만 보면 다단계판매업체들도 어엿한 소매업계의 한 축으로 대우받을 때가 됐다는 주장이 나올만 하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한국사람은 절친한 친구가,가까운 친척이 상품을 구입해 달라고 권유할때 이를 물리칠 수 있는 정신적 문화적 토양에서 자라지 않았다.

암웨이가 태생지인 미국보다 한국에서 맹위를 떨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고가품인 정수기와 기능성 속옷을 주로 취급하는 국내 업체들의 급성장도 같은 맥락이다.

다단계판매 방식으로 이뤄지는 상품 매매에는 ''사적 부조''의 성격이 진하게 깔려 있는 것이다.

정부가 실업자와 빈민을 양산하는 사이 민간은 이런 변형된 형태로 서로를 돕고 있다.

다단계판매 시장의 급성장을 지켜보면서도 우울한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cd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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