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전라남도의 신안군에 속하는 작은 섬이다. 신안군은 두번 크게 이름을 날렸는데, 한번은 그 '앞 바다'에서 보물선이 발견됐을 때였고, 또 한번은 그곳 섬 가운데 하나가 이 나라의 대통령을 배출했을 때였다. 대통령의 고향에서 요즘의 쾌속선으로 10여분 상거에 있는 내고향 섬에서는 3천여 주민들이 거의 모두 농업에 종사하며, 부업으로 낚시질을 하고 돌김을 뜯는다. 특산물은 별 것이 없다. 풍광이 빼어나다고 할 수도 없다. 섬의 서쪽에 솟아 있는 산은 높이가 2백50m도 안되는 야산이지만, 그래도 제법 웅장한 바위를 가진 그 꼭대기를 사람들은 천황봉이라고 부른다. 내가 초등학교를 마쳤을 때 우리 가족이 육지로 이주했으니 내 평생에서 그 섬에 살았던 기간이 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 섬의 이런 저런 해안 자락을, 이 마을 저 마을의 고샅들을, 동네에 함께 살던 어른들의 이름과 성품까지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내 삶의 모든 표준이 여전히 그 섬에 있다. 나는 지금도 그 섬으로 세상을 잰다. 지리산의 높이는 천황봉의 8배라는 식으로, 누가 50리라고 말하면 그 섬의 관청동에서 학교까지의 5배 거리라는 식으로, 8t 트럭을 보면 대섬 염전의 소금 백가마니는 실을 수 있겠다는 식으로, 그 섬의 어떤 것을 떠올려야만 내게는 그 모든 길이와 무게의 구체적인 감각이 생겨난다. 계량의 단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춤 잘 추는 사람을 보면 우리 옆 동네에 살던 단골무당의 춤사위와 우열을 견주고, 천하장사로 등극한 씨름꾼을 두고도 그 섬에서 장사 소리를 듣던 사람과 그의 결전을 가당치도 않게 상상한다. 내가 전공하는 프랑스의 현대시를 읽을 때까지도 어렸을 때 그 섬에서 들었던 민요의 가락을 염두에 두어야 그 운율이 체득되는 것만 같다. 아직까지 나에게 삶의 준거가 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을 내 나름으로는 '고향의 잣대'라고 부른다. 이 문명된 시대에, 세계의 동쪽 끝, 거기서도 멀리 떨어진 어느 궁핍한 낙도의 문물로 세상을 가늠해야 하는 이 잣대질은 참으로 딱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개항 이후 한 세기에 걸친 한국의 역사에 일어났던 비극들은 어찌보면 잣대의 비극이기도 했다. 유진오 선생이 세상을 버리기 직전에 썼던 '양호기'에는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 하나 있다. 우리는 국권을 남의 손에 넘겨 주었던 한말의 위정자들과 관리들이 매우 무능한 사람들이었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와 다르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철저히 공부를 했고, 어려운 과거 시험을 통해 등용된 관리들은 능력도 출중했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강해서 일본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열정적으로 조리정연하게 사안을 따질 줄 알았다. 그러나 일본측에서 "구미 제국의 예를 볼작시면"이라는 한 마디 말만 내뱉으면, 우리 관리들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주눅이 들어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사용하던 잣대가 달라지니 사태를 가늠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후 이 새로운 잣대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온갖 힘을 기울였고, 길지 않은 시일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이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한말의 관리들처럼 '구미 제국의 예'에 겁을 먹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났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그 잣대를 파악하면서 또 하나 알게 된 것은 그 잣대가 수시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근래 몇년간의 예만 보더라도 강대국들의 변덕스런 잣대질에 우리가 치러야 했던 국가적 희생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잣대는 변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기도 한다. 물론 잣대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잣대가 변하고 사라지더라도, 그렇게 변하고 사라지게 만드는 근본적인 잣대가 그 밑에 있다. 이 잣대가 바로 저 사람들의 고향의 잣대다. 국제외교나 통상에서 그때그때마다 현행의 잣대에만 매달리다 보면 우리 같은 처지의 국가들은 늘 한걸음 뒤지게 마련이다. 그 잣대의 향방을 예견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파악하고 그 고향을 아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구미 제국'을 공부할 때, 그 고대와 중세를 더듬어 그 잔뿌리까지 남김없이 캐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